‘진보당’이 귀금속 가게면 ‘좌파’는 채소 이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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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 진보신당이 명동에서 벌인 "대국민 감사 인사와 진보신당 입당 캠페인" 모습. 지금 필요한 것은 쓸데없는 이름 타령이 아니라 실질적인 내용이다. 사진@진보신당


안타까운 총선결과는 뒤로 하고 몇몇 언론들의 판에 밖힌 전망과는 별개로 진보신당에는 새로운 진보에 대한 논의가 곰비임비 일어나고 있다.

아직 자체 내에서 뚜렷한 일정이나 방향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니 벌써 어떻게 진전될지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우리사회 역사에 의미있는 작업일지에 대해서는 기대가 큰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만큼 이 논의는 뜬구름 잡는 담론 다툼 같은 기존의 잘못을 반복하는 것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담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과 뿌리깊게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별 근거없이 서로의 과거의 우상들이나 갖다 들이대며 누가 원조이니 정통이니 맛골목 순대집 다툼같이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진보신당에 대한 믿음이 있지만 이곳저곳에서 피어오르는 말들 속에 이런 우려가 전혀 안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 중 하나가 당명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다. 레디앙에도 "
'진보당'은 귀금속 가게 이름이다'"라는 재미있는 제목에 글이 실렸다. 하지만 내용은 안타깝게도 제목처럼 재미있지 못했다.

'진보'나 '좌우'에 대한 의미에 대한 주관적 주장에 처음의 반이상을 할애하더니, 진보라는 것을 내세우면 10%에 불과한 '구역'에 갇히는 것라고 했다가, 또 당 이름에 '초록'이나 '사회'처럼 선명한 가치가 필요하다고 한다.

당명에 대한 과도한 집착 피해야

생태주의나 사회주의처럼 선명한 가치가 필요하다는 것까진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일반적인 여론 조사에서 진보, 중도, 보수가 통상 서로 30% 내외 나타나는 현실에서 '진보'라고 하면 10% 속에 갇히는 것이라고 강변하면서 다시 국민들에게 아직 생소한 개념을 상징하는 '초록'이나 '사회'같은 단어를 당명에 붙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가 않는다.

홍기표는 진보와 보수는 낡은 개념이어서 버려야 하고 '좌우의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진보와 보수는 어차피 상대적인 개념으로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라면 좌우라는 개념도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좌우라는 개념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직후 소집된 국민의회에서 의장석에서 보아 오른쪽에 왕당파가 앉고 왼쪽에 공화파가 앉은 것이 기원이다. 결국 상대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또 좌파와 우파의 개념은 안정적이어서 형평이냐 효율이냐, 증세냐 감세냐 같은 뚜렷한 해법과 연결이 된다고 한다. 나는 왜 필자가 이런 좌파와 우파라는 '단어'에 특별한 애정과 의미를 부여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보통 그런 개념들과 보수와 진보도 똑같이 연결되기는 마찬가지이다.

결국 진보나 보수나, 좌파나 우파나 상대적이긴 마찬가지이고 현재적으로 논의되는 서로 상대적인 해법과 서로 연결되는 것에도 차이점이 없는 것이다. 지금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이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서로 같은 개념의 다른 표현뿐이어서 이런 '단어'에 집착하는 논의가 소모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진보나 좌파나 같은 개념의 다른 표현일 뿐

당명을 지을 때 보다 중요한 것은 단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다. 서구에서는 정치적으로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이 익숙하게 발달해 왔지만 해방후 좌우대립이 학살과 전쟁으로 이어졌던 우리 역사에서는 부정적인 기억과 결부되어 있다.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이제 논의가 자유로와지자 좌우파를 대체하는 개념으로 주로 쓰이게 된 것이 보수와 진보라는 '단어'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보수언론들은 특정 대상에 감정적 비난을 가할 때 '좌파'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것은 좌우대립의 기억과 반공주의를 자극하는 의도적인 단어 사용이다. 그것이 졸지에 노무현 정부가 족보도 없는 '좌파'가 되어버린 슬픈 사연이기도 하다.

반면 대부분의 언론들은 여론조사 등 국민의 정치적 입장을 묻는 설문에는 '진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 단어가 현실적 정치구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자족적 소수정당이 아니라 세상을 실질적으로 바꾸는 제도권 대중정당을 꿈꾸는 진보신당이 '진보'라는 단어를 선점한 것은 오히려 다행인 것이다. 그 다음 '진보'라는 것에 실질적인 가치를 연결시키는 것은 진보신당의 몫이다.

다시말해 진보의 실질적인 내용을 채우는 것이 정말 우리가 집중해야 할 문제인 것이지 '진보'라는 단어를 바꾸고 안바꾸고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이미 '진보신당'이라는 이름으로 총선에서 구체적인 의석으로 얻진 못했어도 이후 '지못미' 열풍 등 총선 전후의 언론의 주목 덕에 벌써 의미있는 지지율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그 수준은 아직 5% 정도에 불과한 수준이지만 그토록 목말라 했던 인지도 자체는 상당한 수준으로 올라갔다고 볼 수 있다.

진보신당의 논의는 서민의 고통에서 시작해야

그런데 이 상황에서 '신당'이라는 임시정당 냄새가 나는 것을 조금 고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진보'라는 단어까지 빼버리고 완전히 다른 당명으로 바꾸자는 것은 총선과정에서 힘들게 얻는 인지도조차 버리고 보자는 말에 다름아니다. 그럼 총선 전 왜 힘들게 창당해서 선거에 참여했는가.

정말 '진보의 재정립'을 위해 할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지금 상황에서 왜 이런 소모적인 일을 벌이라고 강변하는지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른 이름으로 지금 수준의 인지도라도 다시 확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당력을 낭비해야 할 것인가.

전국단위 중앙정치 투표율이 과반수 이하로 떨어졌다는 것은 얼마나 대중이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17대 총선과 비교하여 총 유권자수 대비 득표수를 계산한 각 정당의 실질 득표율을 보면 범보수계열의 득표는 거의 그대로인 반면 범진보계열로 분류되었던 정당들은 반토막이다. 즉, 대중이 보수정당의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제도권내 진보세력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곧 그동안 범진보진영의 주류를 자처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진보'와 거리가 멀었던 자유주의 개혁세력의 파산이자, 진짜 진보를 자처했지만 실질적인 내용을 보여주는 것에는 실패했던 과거 민주노동당의 패배인 것이다.

이 시점에서 진보신당을 새롭게 시작하면서 일단 급하게 '그릇'부터 만들었다면 이제 부터 그 그릇을 넓혀가면서 내용물을 채워나가는 일이다. 그 내용물을 채워나가는 것은 철저하게 대중이 환멸을 느낀 그 지점에서 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즉, 양극화 확대, 비정규직 확산, 사교육비 폭증, 부동산 거품 등 서민들이 고통받고 한숨짓는 바로 그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뜬구름잡기를 벗어나 실질적인 대안을 논의 하자

그러면서 또한 현재 기후변화, 에너지 위기, 식량 위기 등 대외적으로 닥쳐오는 위기에 대한 고려와 더불어 현실적인 답들을 찾아 나가야 한다. 거대 담론에 대한 논의도 그러한 과정에서 현실에 뿌리박고 진전되어야 뜬구름잡기를 피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진보든 좌파든 보편적 인권, 평등한 사회, 생태적 삶 등 근본적 가치와 현재적인 실질적 의미를 연결지어 구체적 대안을 만들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에서 제기하는 것 처럼 '진보'냐 '좌파'냐 '초록'이냐 '사회'냐 같은 대중들의 현실과는 가장 거리가 먼 표면적 단어부터 따지는 시비는 건설적인 논의 방향도 아닐 뿐더러 오히려 실질적인 논의조차 이름 딱지 붙이기로 전락시킬 가능성이 높다.

대중들이 제도정치에 환멸을 느꼈던 바로 그 지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왜 그 짓을 자꾸 또 하자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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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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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제3의 길과 신노동당, 오독과 베끼기를 넘어

책 표지 사진@인간사랑

기든스 저, 김연각 역, 이제 당신 차례요, Mr. 브라운 - 영국 노동당이 다시 이기는 길, 인간사랑, 2007

영국으로 유학을 오기 전만 하더라도 나에게 제 3의 길이니, 신노동당(New Labour)이니 하는 것들은 그냥 진보를 참칭하는 사이비쯤일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신노동당이 집권한 영국의 현실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영국 정치와 정책에 대한 나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결국 영국에 대한 나의 논문 주제도 사회복지 서비스에서 정치사상 영역까지 확장되는 등 신노동당의 존재가 지난 5년간의 나의 유학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다.

물론 미리부터 밝혀두지만 그렇다고 내가 제3의 길과 신노동당의 열렬한 신봉자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처음에 마냥 신기했던 그들의 정치와 정책방향도 수년간 관찰과 연구를 하면서, 그 한계 역시 목도하게 되어 이젠 그걸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제 3의 길을 주창하여 신노동당의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안서니 기든스의 신서, ‘이제 당신 차례요, Mr. 브라운 - 영국 노동당이 다시 이기는 길’은 당연 남다른 의미로 다가 온 것은 물론이다.

이런 의미는 나에게 한정되어 있는 것 같지만은 않다. 최근에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부쩍 영국식 제3의 길에 대한 관심이 늘은 것도 사실이다. 새롭게 헤쳐모인 민주당의 손학규 대표는 직접 영국 사례를 거론하며 제3의 길과 같은 ‘새로운 진보’를 지향한다고 선언해 관심을 모은 적이 있다. 노무현 정부도 말기에도 제3의 길의 한식구격인 ‘사회투자국가(Social Investment State)’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었다. 노무현 정부의 복지부 장관을 지낸 유시민 의원은 이 개념을 가지고 ‘대한민국 개조론’이라는 책도 펴냈다.

하지만 이 들이 과연 제대로 된 이해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조금 의문스럽다. 신노동당은 그냥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90년대 영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에 맞서 새로운 비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낸 매우 정교하게 짜인 정치사상일 뿐만 아니라 그 일관된 논리와 원리는 지난 10여 년간 신노동당 정부 정책 곳곳에 뿌리 깊게 박혀있으며 이는 실제로 공공 서비스와 사람들의 생활에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왔다.

손학규 대표가 신노동당과 같은 ‘새로운 진보’를 이야기 했지만, 글 쓰는 현재 총선 공식 선거운동까지 들어간 시점에서, 이미 논란이 되어 왔던 ‘대운하’를 제외하고 민주당이 어떠한 정책적 이슈를 만들거나 제기한다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다. 학계에서 논의가 된 ‘사회투자국가’는 더욱 신중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거론된 ‘사회투자국가’의 논의 수준은 의문의 대상이다. 유시민 전 장관의 경우도 책에서 무슨 언변을 펼쳤던 간에 의료보호나 국민연금 등 그가 장관 시절 정책은 당면했던 복지 쟁점들에 대한 그의 대책이란 그 혜택을 줄이거나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보면 수사적인 유사점 때문에 자주 동종으로 취급받는 대처리즘에서의 복지와 사회투자국가에서의 복지 개념을 혼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제3의 길이 글자 그대로 사회민주주의도 ‘아니고’ 대처가 표방한 신자유주의도 아닌 ‘제 3의’무엇인 것도 아니다. 신노동당은 전후 복지국가를 이룩한 노동당 정부의 사회민주주의의 정신을 부정하지 않고, 부정한 적도 없다. 오히려 핵심은 그 정신을 변화하는 현대사회에 맞춰 어떻게 실현시킬 것이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노동당이 극복하고자 하는 구노동당(Old Labour)은 구체적으로 따지면 전후 복지국가를 이룩한 애틀리(Attlee) 정부가 아니라 경제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한, 그래서 대처에게 정부를 뺏긴 6~70년대의 윌슨(Wilson) 정부와 카라한(Callaghan) 정부이다.

영국식 제3의 길을 마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것쯤으로 이해하면서 이를 표방하는 이른바 ‘개혁세력’이나, 옛 노동당이 추구했던 사회 정의에 대한 배신쯤으로 취급하는 ‘진보’쪽의 해묵은 비판 역시 이 점을 흔히 소홀히 하고 있다. 이 책에도 1장에 서술했지만 지난 신노동당 10년 집권의 성과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경제는 영국 현대사 사상 최장 안정 성장을 이뤘으면서 대처시절 상당부분 손상되었던 무상의료 등 공공 정책을 복원시켰을 뿐 아니라 대기기간 등 고질적 문제들 까지도 상당 수준으로 해결 해온 것이 사실이다. 아동 70만 명을 포함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빈곤에서 탈출 시킨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이다.

기든스의 이 책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위치하고 있다. 즉 10년간의 신노동당의 성과와 한계를 들여다보면서 10년 전과는 또 다른 변화된 상황과 새로운 쟁점들에 대하여 새로운 혁신의 방향과 구체적 정책 대안들을 새로운 총리가 되는 (그래서 현재 영국 총리인) 또 다른 신노동당의 대표주자인 고든 브라운에게 보내는 고언 형식의 책인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기든스가 시의성 있게 가볍게 쓴 책이기도 하지만 이 책에 담긴 고민과 논의 깊이는 상당한 무게로 다가온다.

하지만 또 그런 면이 이 책의 약점이기도 하다. 이 책의 초점은 철저하게 영국적 상황, 그리고 책이 출판된 그 시점에 매우 충실하게 맞추어져 있다. 다시 말하면 영국 정치 상황과 정책적 쟁점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적지 않을 뿐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이해할 경우 오독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게다가 이런 이 책의 약점은 번역을 통해 더욱 두각 되기도 한다. 몇몇 구절과 개념들에 대한 오역은 영국 정책에 대한 역자의 이해부족을 드러내기도 한다.


가장 치명적인 번역 상 문제는 영국의 무상의료서비스 체계인 NHS(National Health Service)를 ‘건강보험’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NHS는 일반 조세를 기반으로 무상의료제도로 일반의원과 병원뿐 아니라 각종 보건 정책 기구들을 모두 포괄하는 체계이다. 따라서 공적 재원 수단으로 주로 한정되어있으며 보험료 납입에 의해 수급자격이 주어지는 사회보험방식인 우리나라 건강보험과는 개념부터가 전혀 다르다.

또 보건의료 부분에 대한 구절에서 종종 등장하는 재단 병원(foundation hospital 또는 foundation trust)은 NHS에 속한 병원 중 평가가 우수한 병원을 중심으로 그 운영기구(trust)에 사설 병원과 비슷한 방식으로 자율권과 독립적 지위를 부여하는 정책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국가에 의해 운영되는 NHS에 시장적 요소를 도입하는 대표적 정책으로 노동당 내에서도 논란이 많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 없이 번역이 되다보니 이런 시장적 성격을 고든 브라운이 약화시켰다(water down)는 말이 ‘예산을 삭감했다’고 전혀 엉뚱하게 바뀌어버린 경우도 있다. 교통정책(transport policy)이라고 하면 무난했을 법한 단어를 ‘수송정책’으로 번역한 것도 대중적 공공서비스로서의 원래 의미가 아닌 무슨 물류정책쯤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역자의 영국 정책 쟁점에 대한 이해 부족은 정치학 전공자라는 점에서 양해는 조금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우리나라와 영국 간 ‘정치’개념 차이를 보여주는 현실이기도 하다. 즉, 이 책 자체는 새로운 수상에게 어떻게 성공적 정치를 해서 노동당이 또 집권할 수 있게 만들 것인가를 조언한 매우 ‘정치적’인 책이지만 내용은 정책적 논의로 빼곡히 차 있다. 이는 기든스가 일부러 정책 정치를 유도하기 위해 그렇게 내용을 채운 게 아니라 이미 영국 정치에서는 정책에서 정치적 승부가 나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의회민주주의 산실인 영국 정치가 보여주는 이러한 역동성은 우리 정치에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이 책이 주는 최대의 미덕은 그 역동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현재적 고민과 제안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의 고민은 물론 비단 영국적 현실에 국한하지 않은, 진보의 혁신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진보적 대안을 고민하는 한국 독자가 특히 주목해야할 부분은 ‘공공(public)'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기하고, 보증국가(ensuring state, 본 책에는 ‘확신을 주는 국가’로 번역)의 개념을 제시하는 ‘4장 공공 서비스: 사람을 맨 앞에 두기’와 적극적 복지(Positive Welfare)의 개념을 보여주는 ‘6장 생활양식 바꾸기: 새로운 의제’가 아닌가 싶다.

대처정부는 공공서비스를 대대적으로 민영화 시키거나 시장적 경쟁 요소를 도입한 것은 복지제도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지만 일정부분은 그동안 무시되었던 이용자의 선택권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국가 독점 복지 모델의 문제점을 집은 것이기도 했다. 즉 그 당시 공공 서비스들은 대단히 관료화되었던 것이 사실이며 시민들의 요구는 종종 무시당하거나 이유 없이 주구장창 기다려야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던 것이다. 이에 복지 감축으로 공공 서비스는 줄었어도 서비스 공급과정에 있어 국가의 독점적 지위를 깨뜨림으로서 제공되는 서비스의 만족도는 높아진 사례들이 있다.

기든스는 이런 점에서 공공영역을 확대하되 공공은 곧 국가(state)라는 편협한 규정을 사고는 벗어나서 무엇이 진정 ‘공공성’인가에 대한 재 정의를 시도하고 있다. 이에 맞물린 보증국가라는 개념에서 국가는 공공 서비스 공급에 있어 더 이상 독점적 주체는 아니지만, 그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방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진정 효과적이고 질 높은 공공서비스를 ‘보증하는’책임을 져야하며 그 책임이 구체적인 정책적 수단으로 실현되어야 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적극적 복지 역시 시장 기능 실패에 따른 사후적 개입에서 벗어나 일상적으로 개인의 자율성과 자존감을 증진시키는 복지가 되어야함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얼핏 보면 개인 책임과 선택권을 강조하는 복지 축소논리와 닮은 듯하다. 하지만 기든스가 제시하는 적극적 복지 개념은 개인의 책임 뿐 아니라 그 책임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 적합한 지원에 대한 국가의 책임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장애인의 경우 가능한 사회에 참여하여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할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서 국가는 장애인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 독립성을 보장하고 촉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과 방식으로 서비스를 제공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서비스를 제공하여 자율성을 꺾는 방식을 벗어나 한 개인에게 동원되는 공공 재원 통합해 개인 통장처럼 따로 계좌를 만들어 개인이 스스로 독립적 생활에 필요한 서비스를 직접 설계할 수 있게 하는 개인 예산제(Individual budget)같은 정책이 적극적 복지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딛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희망과 대안을 찾아 제시하기 위한 개혁 진영과 진보진영의 노력으로 점점 서구 복지국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듯하다. 나도 영국 유학생활을 어떻게 하게 되면서 얻은 가장 값진 것은 다른 사회를 깊숙이 체험하고 공부하면서 발견하게 된‘다른 사회에 대한 가능성’점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 ‘다른 사회’가 영국도 아니고 그 ‘다른 사회’를 위한 길이 ‘제3의 길’도, ‘신노동당’인 것도 아니다.

나는 우리사회의 대안을 찾는데 있어 다른 나라에 주목할 때, 그 나라에서 제기되는, 그래서 그 나라에서 성공적이었다는 그 ‘무엇(what)'이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것이 특정 정책이었던 어떤 정치사상이었던 간에 말이다. 오히려 그 ‘무엇’을 이해하면서 궁극적으로 정작 얻어야 할 것은 ‘어떻게(how)'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환경과 조건에서 떨어진 결과물만 달랑 물고 들어와 그 나라 성공사례를 권위삼아 써먹어 보려는 시도가 우리나라에 진정한 답을 줄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 나라의 어떤 조건과 환경 속에서, 어떻게, 어떤 원리로, 어떤 과정으로, 어떤 기반을 통해 그 대안이 도출 된 것이며 또 그 결과물이 어떻게 적용되고, 어떻게 실천되어 성공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고, 어떤 점들이 어떻게 문제가 되어 한계로 들어났는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전혀 다른 환경과 조건을 가진 우리나라에서의 제대로 된 함의를 찾는 다는 것은 명백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점이 이 책과 같이 다른 나라의 고민을 들여다 볼 때 항상 명심해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참여사회연구소가 발행하는 <시민과 세계>에 기고하여 4월 12일 13호에 게재

오마이뉴스, 프레시안에도 축약본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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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4/26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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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저기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습니다. 특히 "기든스는 이런 점에서 공공영역을 확대하되 공공은 곧 국가(state)라는 편협한 규정을 사고는 벗어나서" 이 부분은 많이 공감하게 되네요. 대처 정부가 기여한 바에 대해서도 동의하고요. 특히 유니버셜테스팅이라는 개념은 괜찮은 것 같아요. 결국은 그마저도 정치가 동원되기는 하지만요.
    • 2008/04/26 22:43
      댓글 주소 수정/삭제
      공감하시며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원칙은 지키되 변화하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유연해지고, 그래서 실질적인 해법을 찾아나가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이 현실에서 쉽지만은 않고 그러다가 원칙이 흔들리는 경우도 많지만 말입니다.
  2. 라인
    2008/05/29 14:10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좋은 서평을 읽은 것 같아 감사합니다. ^^ 비록 영국 실정을 잘 모르긴 하지만,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군요.

보수 지배? 진보 분열? 지금 이런 것이 정말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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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총선 개표가 완료된 10일 새벽 여의도 한나라당사 상황실의 종합상황판에 한 당직자가 당선이 확정된 후보 이름에 태극기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 남소연
한나라당

총선 이후 언론이며 논객들이며 저마다 총선 이후 정국에 대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10년 진보 체제에 대한 심판"이라느니, "장기 보수 지배체제의 등장"이라느니, "진보정당이 분열 탓에 대가를 치렀다"느니, "향후 민주노동당이 진보 재편의 주도권을 잡을 것"이라느니 다양한 관점에 다양한 전망들이다.


하지만 서로 의견은 다르지만 하나같이 당장 드러난 의석수와 득표수같은 수치들에 기대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정작 우리 사회와 우리 정치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진단을 찾아 보기 어렵다.


왜 투표율은 대표성에 의문을 가질 정도로 과반 이하로 떨어졌는지, 왜 아무런 쟁점도 없는 이상한 선거가 되어 가는지, 10년 만에 일어난 행정권력에 이은 입법권력의 교체에도 왜 이렇게 분위기는 그 이전의 권력교체와는 다른지, 이런 질문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숫자에 가려 실종되었다.


낮은 투표율과는 다르게 개표방송 시청율은 높았다는 뉴스가 들린다. 정장 사람들에게는 이제 정치란 정말 자신의 삶과는 별 상관없는 안방극장 드라마쯤이 되고 있는 것이다. '친박연대'같은 코미디 같은 정당이 득표를 할 수 있는 이유도 투표 행위조차 죽어가는 드라마 주인공 살리라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정치는 안방 드라마로 전락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삶속에서 부딪치는 사회 문제란 점점 그 도가 넘어가고 있다. 당장 오르고 있는 물가도 일시적인 상승이 아니라 그 뒤엔 지구 온난화, 에너지 위기, 인도와 중국의 급성장 등 굵직굵직한 변화들이 자리하고 있다.


더욱이 신용 위기로 촉발된 세계 경제 침체는 많은 사람들이 베이징 올림픽 이후 오히려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주기적 침체라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소로스처럼 2차 세계대전 이후 성립되어온 달러 중심의 세계 경제체제 자체의 위기라고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에너지 위기, 기후 변화는 또 어떤가. 국내 언론들이 국제 문제에 소홀한 사이 이미 여러 번 식량과 식수 대란, 새로운 전염병의 출현, 석유의 급속한 고갈 등 치명적이고 암울한 위기에 대한 전망들이 다양한 근거들과 함께 출현하고 있다.


이런 위기들이 당장 어떤 결과를 내놓지 않더라도 이러한 깊이조차 가늠하기 힘든 위기에 대한 불안감에는 작은 사건 하나에도 심각한 경제 혼란을 촉발할 수 있는 잠재력이 들어 있다. 세계는 그렇게 점차 불안해지고 있다.


  
9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투표소가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이정훈
투표소

내부는 어떤가. 이미 최근 환율파동은 현재 우리나라가 얼마나 외부 충격에 취약한지 보여주었다. 현 정부는 70년대 독재시절 때도 잘 통하지 않던 관 주도 물가통제를 해법으로 내놓는가 하면 위기관리도 모자랄 이 때에 6% 성장론에 묶여 금리인하, 각종 규제완화 등 도박성 경제정책들을 쏟아놓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저의 복지수준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사회 동질성으로 인해 그나마 유지되던 사회통합은 바닥에서부터 붕괴조짐을 보이고 있다. 97년 경제위기 때부터 심화하기 시작한 양극화는 이제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게다가 확산된 비정규직, 각종 고용 불안으로 일반적인 가계의 수입구조는 매우 불안해졌으며 최근 물가 상승은 고용의 상당수를 흡수하던 자영업을 치명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그나마 계층 상승의 수단으로서 믿음이 있던 교육은 치솟는 사교육비로 인해 더이상 사회통합 기제로서의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다. 속된 말로 이젠 있는 놈이 더 공부도 잘하고 없는 놈은 죽다살아도 따라 잡을 수가 없다. 이는 현실 삶의 어려움이 자식에 대한 교육으로 해소되던 통로도 상실되고 있음을 뜻한다.


안팎에서 벌어지는 '위기'들... 탈출구는?


이렇게 우리 사회는 한국전쟁 이후 전례없이 '있는 놈'과 '없는 놈'이 분리되는 과정을 겪고 있으며 이는 전례없는 사회 계층 간 갈등이나 적대감으로 진전될 수 있다. 이러한 분리현상과 심리적 박탈감이 결부될 경우 어떤 새로운 사회 문제로 표출될지는 솔직히 가늠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지난 10여 년간 민주화되었다는 정치조차 이렇게 심각해지는 삶의 어려움과 별로 관계가 없다는 점들을 몸소 체험하였다. 그래서 점점 현실적으로 절박한 문제들에 대한 욕구가 제도 안에서 정치적으로 표출되는 길이 상실되고 있는 것이다.


이 결과 지방선거도 보궐선거도 아닌 전국단위 중앙정치 선거 투표율이 과반 이하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이미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정치 쟁점도 의미있는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그래서 한나라당이 몇석을 더 얻고, 박근혜가 무슨 발언권을 가지고, 민주당이 얼마나 선전을 했고 따위의 일들은 우리 사회 현실과 별 상관이 없는 말 그대로 '정치연예' 뉴스거리에 가깝다. 안 그래도 다가오는 위기를 더욱 부채질 하는 현 정부가 그 '삽질'을 얼마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3월 8월 자양동 골목시장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도너츠를 사고 있다.
ⓒ 청와대 제공
물가인상

정작 문제는, 점증하는 사회 위기에 대한 해법은커녕 인식이라도 하고 있는 현실 정치세력이 거의 전무하다는 데 있다. 한나라당이 과반을 획득해 봐야 보수지배체제는커녕 현존하는 무력한 한국 정치 전체와 함께 빠르게 몰락해갈 가능성이 크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성격과 깊이의 사회 위기 앞에서 아무도 해법을 내놓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국 제도정치 전반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급증하는 사회 불만과 욕구가 제도 정치로 표출되는 길이 상실되고 만다면 그 통제하지 못하는 혼돈과 불안이 어떤 결과를 맺을지 현재는 누구도 가늠하기 어렵다.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한 이유없이 폭력적이고 상대를 가리지 않는 범죄들이 어떤 전조일 수도 있다.


뜬구름 잡는 담론이 아니라 포괄적 대안을 찾아라


진보의 대안을 고민하는 이들이 단순히 정치세력으로서의 생존을 넘어, 더욱 크고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히 담론 수준에 그쳐서도 안 되지만 개별적인 진보적 정책들의 나열로 그쳐서도 안된다.


현재 우리가 처한 근원적인 문제들을 냉철히 파악하고 장기적인 연구와 분석을 거쳐 핵심적이고 구체적이며 포괄적인 방향과 정책을 모색해야 한다. 물론 이를 바탕으로 지역에서부터 차근히 다져나가며 정치 기반을 닦아야 할 것이다.


정작 우리에게 닥친 문제는 이런 것이다. 단순한 몇 석과 특정 정치인의 발언권이 아니다.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마저 그런 습관적이고 표면적인 논의에 머무르는 한 걷잡을 수 없는 혼돈과 혼란의 암울한 전망은 점차 현실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 2008년 4월 11일 오마이뉴스 기고, 12일 '으뜸' 기사로 보도

보도본 보기: '정치연예 코미디' 속에서 진실을 보자

* 이 글은 이전 블로그에 썼던 아래의 글을 다시 정리해서 기고한 것입니다.

2008/04/10 - [주저리 주저리/적어본 생각들] - 총선 후, 이제 정말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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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가 보수화? 보수정당 실질 득표율 변동 거의 없어

투표 결과를 놓고 한나라당 및 기타 보수 정당이 200석 이상을 차지함에 따라 우리 사회가 보수화 되었다는 전망을 쏟아놓고 있다. 정말 그런가? 그런데 분위기는 왜 이렇게 썰렁한가. 당장 드러나는 의석수에 가려진 진실을 들여다 보기위해 중앙선관위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을 해보았다.

인물 등으로 다른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지역구 투표를 제외하고 정치성향이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정당투표만 가지고 한번 따져보도록 하자. 우선 투표인 수를 기준으로 17대와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정당 성향별 득표율을 보면 아래 그래프와 같다.(실제 정당득표 합계가 아닌 총투표인수로 계산하여 실제 비례대표 득표율과는 차이가 있음)

의석수로 반영된 상대 득표율에선 보수세력이 약진한듯 하지만...


보수세력은 17대 선거에서 한나라당과 자민련, 18대에는 한나라당, 자유선진당, 친박연대를, 개혁세력은 17대 때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18대 때 통합민주당과 창조한국당을, 진보세력은 17대 민노당, 18대 민노당과 진보신당을 포함한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총투표자 대비 정치 성향별 각 정당 득표율 합계 추이

17대 때보다 18대 선거에서 16.23%가 빠진 개혁세력과 4.37%가 감소한 진보세력의 몰락도 눈에 띄지만 반면 18.52%가 증가하여 57%를 차지한 보수세력의 약진도 눈에 들어온다. 과연 우리사회 보수화를 이야기 할만한 모양새다.

하지만 이는 낮은 투표율에 의한 착시현상이 들어있다. 결국 선거의 결과 의석수로 나타나는 이 득표율이란 상대당을 찍은 다른 표에 비해서 자기 표가 얼마나 많았나를 따지는 상대적 득표율이다. 즉, 실제 절대적인 지지세가 얼마나 늘었는지와는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특히, 이번 선거에서는 투표율이 지난 17대 때 60%에 비하여 46%로 급감했다. 그만큼 낮은 투표율에 의한 선거의 대표성 문제와 더불어 민심 왜곡의 문제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바닥 민심 반영하는실질 득표율에선 개혁진보 몰락에도 보수 지지 거의 변동 없어

그렇다면 이를 고려하여 과연 각 정치 세력의 실질 득표 추이를 보기 위해 전체 총 유권자수를 기준으로 다시 득표율을 계산해 보면 결과는 어떨까. 아래의 그래프는 사뭇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18대 선거에서 개혁세력과 진보세력의 몰락은 총유권자 대비 득표율이 17대에 비해 절반 이하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 더욱 두드러진다.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 보수세력이 정작 추가로 확보한 득표수준이란 매우 초라한 수준으로 드러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총 유권자수 대비 정치성향별 각 정당 득표율 합계 추이


즉, 보수세력이 200석이상 이라는 절대 의석을 차지 압승(?)은 개혁진보세력에 대한 실망과 환멸의 결과 투표율이 떨어져 나타난 철저한 어부지리인 셈이다. 선거 결과가 제도권내 개혁과 진보 정치세력이 몰락한 것을 보여주긴 해도 그것이 '보수화'되었다는 것과 한참 거리가 멀다.

결국 보수세력이 확보한 지지기반이라는 것은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다는 탄핵 역풍이 몰아치던 시절에서 고작 3%를 확장하는 데 그쳤다. 보수세력은 진보개혁세력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 대안세력으로 승인받는데에는 실질적으로 완전 실패한 것이다.

보수지배? 최악이었다는 탄핵 역풍때 비해 실질 득표율 고작 3% 증가

다시 말해 우리사회가 보수화가 된 것이 아니라 제도 정치권 내 개혁세력 및 진보세력이 정치적 지지를 상실한 것일 뿐이다. 오히려 보수세력은 이런 호재에서도 거의 자신의 지지를 확장하지 못했다. 보수 주도체제가 도래했다고 주장하기에는 매우 민망한 현실이다.

이명박 정부는 이번 총선에서의 압승(?)을 바탕으로 논란이 있던 정책 밀어붙이기에 나섰다. 하지만 금감한 투표율 속에 감추어진 진짜 민심은 보수세력을 주도세력으로 승인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당장 의석수만 믿고 무리수를 두다간 보수세력의 정치적 생명만 단축할 가능성이 크다.

보수장기지배체제라느니 하는 것은 현실은 보지도 못하는 헛소리일 뿐이다. 이러한 가려진 진실은 개혁, 진보세력이 무엇을 반성해야 하고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의미 있는 함의를 제공한다. 보수화 되었다고 거기에 편승하다간 같이 망한다는 얘기다.



[참고]17대, 18대 국회의원선거 정당 정치 성향 별 득표 분석 표

 

17

18

증감

각 정당 득표수

보수1

        7,613,660

        6,421,727

 

보수2

            600,462

        1,173,463

 

보수3

                         -

        2,258,750

 

개혁1

        1,510,178

        4,313,645

 

개혁2

        8,145,824

            651,993

 

진보1

        2,774,061

            973,445

 

진보2

                         -

            504,466

 

유권자수

      35,596,497

      37,796,035

 

투표자수

      21,581,550

      17,415,666

 

투표율

60.63%

46.08%

 

투표인수 대비 득표율

보수

38.06%

56.58%

18.52%

개혁

44.74%

28.51%

-16.23%

진보

12.85%

8.49%

-4.37%

유권자 대비 실질 득표율

보수

23.08%

26.07%

3.00%

개혁

27.13%

13.14%

-13.99%

진보

7.79%

3.91%

-3.88%

* 17대 정치성향별 정당 분류
보수정당: 한나라당(보수1), 자민련(보수2)
개혁정당: 민주당(개혁1), 열우당(개혁2)
진보정당: 민노당(진보1)
* 18대 정치성향별 정당 분류
보수정당: 한나라당(보수1), 선진당(보수2), 친박연대(보수3)
개혁정당: 민주당(개혁1), 창조한국당(개혁2)
진보정당: 민노당(진보1), 진보신당(진보2)


- 2008년 4월 13일 프레시안에 기고, 14일자로 보도

보도본 보기: "국민들은 보수의 손 들어준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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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4/13 08:28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굉장한 자료군요!! 퍼가서 마구 돌리겠습니다. 괜찮으신가요?
    • 2008/04/13 16:59
      댓글 주소 수정/삭제
      CCL에 표시된 것 처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금지를 조건으로 얼마든지 이용 가능합니다.

나의 운동, 자주파, 그리고 민주노동당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2 창당을 지향했던 민주노동당 임시 당대회, 그러나 종북주의 존재와 민주노동당의 사망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사진@오미아뉴스 이재덕


"정말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있나요? 민주노동당에?"

반갑게 온 지역 위원장님의 전화를 받았을때 답답한 마음에 그렇게 물었다. 종북주의라...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은 알고는 있었다. 고백부터 하자면 나는 소위 자주파였다. 10여년전 대학생이던 시절에 말이다. 그때는 자주파라는 말도 없었다. NL이니 민족해방파니 했다.

물론 뭣 모르고 운동에 참여하게 될 때는 몰랐지만 1학년을 지날때쯤 운동권에도 다양한 분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김영삼 정부 시절이던 그 때 열심히 조직하고 거리에 나서는 자주파가 좌파 이론가 족보나 따지기 좋아하는 평등파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걔중 북을 유독 지나치게 흠모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국을 사랑하는 열정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문제삼진 않았다. 정부의 오락가락한 대북정책 덕에 전쟁위기설이 심각하던 때라 북한과 화해하고 평화를 도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던 그 때 였다.

나도 10여년 전, 대학생 시절엔 소위 '자주파'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순수하던 그 열정은 소중히 간직하고 시민운동에 뛰어 들었다. 하지만 세상이 그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에 이해하던 것처럼 미제와 그 앞잡이들만 때려잡으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그런 단순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운동가로서 살기엔 운동의 지표가 될 대안적 논의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없는 사정에 어거지로 영국으로 유학길까지 올라 그렇게 5년의 세월을 보냈다. 의회 민주주의 산실이라는 이들의 정치를 보면서, 복지국가라고 하는 이들의 정책을 공부하면서, 무엇을 배울 수 있고,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면서 우리사회의 대안을 내어보기위한 단초를 찾는 시간들이었다.

그랬기에 영국사회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만큼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을 놓을 순 없었다. 민주정부를 가졌다는 우리나라가 양극화, 고령화 등 새로운 수준의 사회문제에 직면하면서 민주주의가 작동하여 대안이 도출되기 보단 과거 권위주의적 틀에 갇혀 미봉책만 반복되는 것을 지켜 보았다.

그 가운데 방치된 서민들은 급증하는 사회문제를 홀로 개별적으로 감당하느라 더욱더 극심한 고통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보아왔다. 그런데도 민주정치를 이해조차 못한 구태의연한 정치권는 서민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허무한 다툼으로 절망만 안겨주는 것을 보아왔다.

그럴수록 소중해지는 것은 민주노동당이었다. 누가 무어라 해도 명백하게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을 대표하고, 분명하고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가장 근대적인 정당 구조를 가진 정당은 민주노동당 밖에 없었다. 그래서 민주주의적 대표성을 가지고 명확한 대안을 제출할 수 있는 제도권내 정치세력은 민주노동당 밖에 없었다.

공부할 수록 소중하게 다가오는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가입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결국 민주노동당에 당원으로 가입했다. 공부를 마친후 무언가를 하겠다는 것보다 당장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는 것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운동권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주변에서 손가락질 해도 그래도 희망의 근거는 거기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민주노동당이 가야할 길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 이를 심각하게 느낀 것은 부유세 공약을 실현시키겠다며 입당했던 윤종훈 회계사가 탈당했을 때였다.
이미 자주파가 최고위원회를 싹쓸이 했다고 말이 많았었다. 그 때 윤종훈 회계사는 '선거때 써먹었으면 됐지 부유세 얘기를 왜 자꾸하느냐'는 최고위원회의 분위기에 결국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는 10여년 전 투쟁에만 목 매던 학생 운동시절을 그대로 연상시켰다.

안그래도 2004년 국회 진출 후에 학교 급식 운동, 상가 임대차 보호법 제정운동 등 활발하고 생동감 있었던 생활 정치가 오히려 실종되고 뻔한 정치투쟁에만 당이 휘말리는 것이 의아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수의 조직력으로 당권을 장악한 자주파와 그런 변화가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잘 몰랐었다.

그 때는 의원의 당직 겸직 금지 조항으로 정책을 실현시키는 공간인 의회와 대중과 호흡하는 공간인 당을 분리시킴으로서 생긴 병폐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2006년 부당한 판결로 의원직을 잃은 조승수 전 의원이 당대표 선거로 나설 때, 의회 경험이 있는 사람이 당대표가 됨으로서 이런 병폐가 풀릴 수 있겠다 생각하며 반겼다.

그런데 당대표 선거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선거법 위반으로 조승수 전 의원을 대표로 뽑아도 대표직을 수행 할 수 없다는 흑색선전이 선거를 뒤덥었고, 결국 인지도에서 한참 떨어졌던, 그러나 자주파가 지지한 문성현 대표가 선출되었다.

게다가 당이 정책 정당으로 발전은 고사하고 이상한 일만 반복되었다. 반복되는 선거 참패로 지도부가 총사퇴해봤자 선거를 하면 자주파 지도부가 또 당선 되었다. 종이당원, 대리 투표, 조직 동원 등 6, 70년대 독재정부를 연상시키는 부정행위 사례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당은 매번 유야무야 넘어갔다.

당 회계는 공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엉망이 되고 당직자의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당 책임자 입에서는 '헌신성'을 강조하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헌신성은 10여 년전 지겹도록 들었던 자주파 운동가의 핵심 덕목이었다. 그 것이 고작 국가 보조금까지 받는 제도권 정당에서 월급도 제대로 안주면서 잠자코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소리였단 말인가. 그런 아마추어적 사고로 다른 제도권 정당과 경쟁이 될리 만무했다. 우수한 인재를 끌어와도 모자를 판에 그렇게 민주노동당은 있는 사람도 몰아내고 있었다.

점차 퇴행적으로 변해 간 민주노동당, 드러나는 자주파 당권장악의 의미

그럴수록 자주파의 당권장악이 갖는 의미는 점점 더 분명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자주파 비판에만 안주한 상대 정파라는 평등파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단지 이것은 자주파대 평등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수의 조직력으로 언제나 당권을 장악하는 자주파는 단지 평등파 뿐 아니라 다양한 당내 논의가 당 활동에 반영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시켰다. 이는 제대로된 제도권 정당으로 성장을 가로막을 뿐만 아니라 구태의연한 운동권식 당 운영으로 민주노동당을 점점 추락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정점은 지난 대선에서 자주파의 지지를 업고 당선된 권영길 후보가 내세운 '백만 민중대회'였다. 이른바 민주개혁진영이 몰락한 그때 새롭게 진보의 가치를 세울 수 있는 그 때, 진보적인 정책적 비전이 무엇보다 절실했던 그 때, 중심 전략으로 내세운 것이 고작 판에 박힌 '대규모 집회' 였다.

이 역시 그 아득한 10여년전에 학생시절 들었던 계급혁명의 자주파 버전인 '전민항쟁'의 재판이었다. 기가 턱 막혔다. 산속에서 아직도 2차대전에 끝난지 모르고 숨어있었다던 일본 병사가 생각났다. 당원용 메일로 날아드는 그 10여년전 학생운동권 문건과 거의 다름없는 수준의 논리를 보면서 절망했다.

원내 3당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정당 해산에 가까운 3%의 지지에 멈춘 이후에야 당 혁신 문제가 심각하게 떠올랐다. 처음에는 종북주의를 말하면서 당을 일찌감치 떠나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어떻게 세운 당이었는데, 아무리 그렇게 당이 썩었을까 등등 아쉬운 희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도 심상정 의원이 있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간 정책적 비전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그러면서 가장 선명한 민주노동당의 비전을 이야기하는 정치인 아니었던가. 그가 당대회에 제출할 혁신안을 제시했을 때 단호한 조치들에 다소 놀라웠지만 그간 자주파의 당권장악이 의미했던 바들을 생각하면 불가피한 수순으로 이해 되었다.

당대회 혁신안은 자주파가 반성과 혁신의지가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즉, 최소한 그동안 극단적으로 드러났단 당권파의 폐단들을 자주파를 비롯한 당 자체내에서 스스로 인정하고 청산하고자하는 의지가 확인되지 않는 이상 당 혁신은 요원한 것이었다. 그 대표적 폐단들이 당에 스파이 행위를 한 당원에 대한 불분명한 조치였고, 평화지향 정당으로 용납될 수 없는 핵 자워권 발언이었고, 종이당원, 집단 당적이동, 대리 투표 등 추악한 부정행위로 당권을 장악해 온 패권주의 였다.

특히 쟁점이 되었던 최기영 전 사무부총장, 이정훈 전 중앙위원에 대한 제명 안건은 자주파가 당의 정체성을 기본적으로 존중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아닌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당원의 성향 분석 자료를 북한에 넘긴 스파이 행위는 당 정체성에 대한 부정이었고 이에 대한 반성과 단호한 조치 없는 당의 혁신이란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주파 인사들은 각종 인터뷰에서 이를 '신념'의 문제라고 했다. 북한을 위해 당에 스파이 행위를 한 것이 신념이라면 그것은 말그대로 종북주의가 아니면 무엇인지 모르겠다. 자주파는 당대회에서 수적우위를 바탕으로 국가보안법을 무기로 총공세를 펼쳐 이미 드러난 사실관계조차 뒤흔들어 놓았고 결국 압도적 표차로 혁신안을 부결시켰다.

설마설마했던 종북주의의 존재가 드러나고 그것이 얼마나 당을 썩게 만들어 놓았는가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종북주의가 아닌 패권주의라 생각했었지만 결국 '종북주의를 하기 위해 패권주의가 나타나는 것'이라는 진중권씨의 지적에 동의하게 될 수밖에 없게 된 순간이었다. 종북주의라는 퇴행적 사고에 젖은 이들이 이를 억지로 실현시키기 위해서 나왔던 각종 부정행위들이었고, 그 외골수에 다양한 논의와 대안은 압살돼왔던 것이다.


이미 그 전에 자주파는 대선 참패를 평가한 안건에 대해서도 '실망스러운 결과'라고 수정함으로서 참패를 인정할 뜻도, 그래서 이를 극복할 혁신을 받아들일 의사도 없음을 확인하였다. 그것도 당내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당대회서 벌어진 일이다.

그래서 나는 민주노동당이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혁신 불능정당이된 민주노동당이 이젠 진보정당도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민주노동당을 떠나고자 한다. 혹자는 민주노동당을 더이상 죽이지 말라고 하지만 당 정체성 부터 부정하는 세력이 다수를 장악해 당전체를 좌주우지 한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무슨 재주로 당을 죽지 않게 할 수 있는지 매우 의문스럽다.

이제 한국을 떠나온지도 5년째, 10여년전 학생 운동을 같이 했던 사람들과도 연락을 못한지 꽤 되었다. 생활인이 되어있을 수도 있고, 운동한다고 현장에 남아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이번 민주노동당 사태에서 이렇게 민주노동당이 썩어 문드러지고 무너지는데 일조를 했다면 정말이지 마음껏 원망하고 싶다.

이제 통일과 자주를 '자주파'와 분리하고 그들의 진보운동내 역할을 재평가 할 때

나는 통일 운동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사회 핵심 문제라고 보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의 핵심 과제중 하나라는 점을 충분히 동의한다. 또한 나는 자주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반미에 매몰되는 단순한 사고를 거부하지만 외국에서 볼 수록 우리사회가 얼마나 미국에 편향되어 있는가를 알게 되었기에 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국제사회에서 제대로된 우리의 역할을 찾고 우리사회의 대안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통일과 자주의 가치를 운동권 세력인 '자주파'와 이제 분리해서 사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가치와 분리하여 그동안 학생운동의 몰락과 노동운동의 쇄락과정 등에서의 '자주파'의 역할에 대하여 진보운동 전체가 재평가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제 퇴행적 운동권 집단으로 변질되어 버린 '자주파'가 그 특유의 조직력으로 또다른 진보운동을 망가트리는 것을 방치하기엔 우리에겐 이미 기회가 바닥나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의 과제와 자주의 가치가 '자주파'의 전유물이 되어 진보운동에서 함께 몰락하기엔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부질없는 부탁인 줄은 알지만 자주파에 속한 이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맹목적이리 만큼 쫓는 그 '자주'와 '통일'의 가치를 스스로 어떻게 퇴락시키고 있는지 돌아보길 바란다. 반성도, 혁신도 부정하는 당신들은 다른 이들이 부정하기 전에 스스로 진보임을 부정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몰락도, 심지어 지난 대선 문국현 후보의 출마까지 미 중앙정보부의 농간이라고 부르짓는 그대들은 심각할 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경영과 형님 아우 할 소리일 뿐이다.

- 2008년 2월 10일 오마이뉴스 기고, 11일 '오름' 기사로 보도

보도본 보기: 나는 왜 민주노동당이 죽었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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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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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중권이 맞다 민주노동당내 자주파는 진보 아니다

    2008/03/16 13:56
    삭제
    진중권이 민주노동당 내 자주파에 대해 '그 사람들 절대 진보진영이 아니다'며 특유의 직설적인 발언을 쏟아냈다(진중권 "자주파는 진보 아니다. 얘기 들어보면 가관"). 진중권은 기사에서 민주노동당내 자주파에 대해 '진보가 아닌 종교집단'이라고 잘라 말한다. '북한을 상전으로 모시고, 북한을 본사라 부르는' 등의 대북 종속성을 비판하면서다. 비민주적인 방식의 '쪽수 정치'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운다. 바른 지적이다. 다시 말하지만, 비판받아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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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까치
    2008/02/16 18:14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보영님 글 잘 읽었습니다. 솔직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겠지요. 바로 이런 솔직함으로 좋은 세상 만듭시다. 가까운 시일 내에 만나뵙기를 빕니다.
  2. 장지영
    2008/04/17 02:57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어떻게하다보니,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는데 글을 보니 참 어찌할 바를 모르겠네요.
    직접 겪으신 건가요?
    마찬가지 이유로 종북으로 몰아가며, 민주노동당 죽이기에 나섰군요.
    저는 평등파 자주파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도 않고, 어른들이 무책임하게 편가르는 그런 것도 솔직히 역겨운 평당원입니다.
    님이 말씀하신데로 운동가의 핵심덕목이라 하는 헌신하는 지역이 일꾼들을 보며
    새삼 저런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있고, 정당이 있구나
    내돈 만원이 아깝지 않겠다 여겨 당원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팔짱끼고 지켜보다가 조금씩 함께 장애인 이동도우미나 푸른학교사업을 했고,
    이후에는 정치적인 활동까지 했습니다.
    이라크파병반대, 선거투쟁, 평택미군기지확장 반대투쟁, 뉴코아 이랜드 투쟁. FTA투쟁등
    지역사업부터 선거, 그리고 투쟁.
    후보로 나간 사람들이 평택에서 연행되어 가면서까지 몸사리지 않는 그들을 보며
    믿고 함께 해도 내청춘 아깝지 않겠다 여겼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얻어가는 거 아닌가요?
    저는 제가 보는 아니, 제 지역에 사람들을 보면 지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저 역시 너무 힘들어 잠수도 몇번 타보고, 회피도 해봤습니다.
    그럴정도로 그들은 당신이 비꼬는 그 헌신. 그렇게 헌신적으로 살아내고 있습니다.
    뭐가 문제가 된건지. 북을 상전으로 모신다구요? 참.....예전 독재시절 빨갱이로 몰아가던 때보다 더 무섭습니다.
    4년간 의정활동하며 동지라 하던 사람들이 종북으로 몰아가며, 남아있는 사람들을
    아주 어렵고 외롭게 만들고, 어쩜 그리도 냉혹하고 무서울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른들, 지도부 두 정당 모두 책임져야 합니다.
    당원들을 몹쓸 사람으로 만들고 상처준 점 무릎꿇고 사과해도 풀리지 않을 참입니다.
    대북종속성을 얘기하는 지역의 일꾼은 없습니다.
    그냥 6.15나 8.15 행사에 가서 통일을 얘기하고, 축제처럼 율동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시간을 갖곤 했지요.
    저희는 평택과 이랜드 투쟁에 사활을 걸고, 싸웠습니다.
    평일에도 퇴근하고 가까운 야탑과 강남에 가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눈물을 흘리고,
    평택에 어르신들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에 사무치기도 했습니다.
    명절에는 꼭 어르신들을 찾아가 마을잔치도 벌이고. 떠나가셨지만, 땅은 빼앗겼지만,
    미국때문이 아니라, 부당한 정부가 아니라, 정말 그 늙고 힘없는 어르신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강했기 때문입니다.
    당신네들은 참 말도 잘하지요.
    저는 무식쟁이라서 저의 당을 옹호하는 글을 잘 쓰지 못합니다.
    진보신당이라고 하는 곳은 연예인들도 다 가셨고, 평론가들 , 말씀 잘하시는 언변가들이
    넘쳐나서.....참 부럽기도 합니다.
    그곳에 계신분들. 저희 종북으로 몰고 마음이 어떠신지 묻고 싶네요.
    한나라당, 조선일보보다 더 무서운 당신들이 그래서 더 더 밉고 싫어집니다.
    언젠가는 역사가 판단해줄겁니다.
  3. toakdmf
    2008/05/12 13:28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여보시오...역사가 판단해줄겁니다 "를 쓰신분!!!평택의 어른들은 않지켜주어도 좋으니 당신식구들과 부모님부터 잘~~~모시길 바라오...정치는 꾼들한테 맏겨두고 제할일이나 잘하면 이것이 애국이요....(무실역행)!!!!!!!!!!!!!!!!

진정한 정계개편 망친 건 노무현 자신

- 그의 꿈은 그에 의해서 무너졌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대통령의 상심이 큰 모양이다. 노무현 정부를 실패로 규정하려는 어떠한 움직임에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던 청와대에서 이번에 대통령이 직접 '실패'를 거론하고 나섰다.

대통령이 지난 7일 청와대브리핑에 직접 올린 글에서 '정치인' 노무현이 좌절하고 있음을 토로했다. 그는 대통령이기 이전에 정치인이었기에, 정치인으로서의 실패는 대통령으로서의 실패보다 더욱 근본적일 수밖에 없다.

그는 '좌절'의 원인으로 열린우리당의 분당 위기를 들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그가 정치인으로서 가장 큰 이상으로 삼은 정계개편을 상징하고 있었으며, 그 붕괴는 그 이상의 붕괴를 의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분당의 책임을 당을 깨고 나가려는 사람들에게 돌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들을수록 답답함이 가슴을 옥죄어 온다. 그의 진정한 정계개편을 이미 산산이 부수어버린 당사자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왜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꿈은 무슨 의미였을까

노무현 대통령이 그토록 꿈꾸어온 정계개편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이번 그의 글에서도 쉽게 유추해 낼 수 있다.

진정으로 국민의 이해를 반영하고 사회적 갈등을 풀어내는 정치, 지역주의를 정치인의 권력욕을 위해 이용하는 정치가 아니라 정말 국민과 나라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서 머리를 맞대고 경쟁하는 정치, 그래서 정말 건설적인 대안을 생산해내는 정치,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모두 꿈꾸는 그런 정치.

그렇다면, 그런 정치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답은 금방 나온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신념과 가치에 맞는 대안을 제시하고 국민은 그 대안을 선거를 통해 선택하고 선택받은 정치인은 그에 맞게 실천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실천에 비추어 국민은 다음 선거에서 또다시 선택권을 행사하면 된다.

이런 상식에 비추어볼 때 지역주의 극복 방법도 명료하다. 즉 출신 지역이 아니라 정책과 대안이라는 실질적 선택기준이 제시될 때 지역주의는 비로소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선택기준이 없는 한 아무리 제도적인 개혁을 한다 해도 지역주의라는 기존의 선택기준이 실질적으로 무력화될 수가 없는 것이다.

지역주의 대체할 기준, 노무현 정부가 무너뜨렸다

▲ 노 대통령은 2005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서민생활 안정과 양극화 문제 해결 등 경제살리기에 총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식료품점을 30여년간 운영해온 이종순씨가 TV 생중계화면를 통해 기자회견을 지켜보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그래도 지난한 민주화 과정을 통해서, '구체적'은 아니더라도 '경향적'으로 가치와 대안에 기초한 선택기준이 있긴 있었다. 흔히 말하는 '진보'와 '보수'가 그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제도권내 정치를 통해서 전면적으로 반영되고 구체화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진보'는 대내적으로 소외계층과 서민의 사회적 권리를 더욱 중시하고, 복지를 지향하며, 대외적으로 북한과의 화해를 통한 한반도 평화를 우선시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리고 '보수'는 대내적으로는 부의 집중에 관대하며 경쟁을 중시하고 성장을 우선시하며, 대외적으로 북한과의 화해보다는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국민들은 이런 경향적인 두가지 방향 중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선택함으로서 '진보'적 방향에 대한 동의를 표출한 것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그동안 이런 국민의 민주적 선택을 철저하게 무시함으로서 그나마 남아있던 '경향적' 선택 기준마저 철저히 붕괴시켰다.

예산 좀 증가했다고 복지정부? 미안하다, 틀렸다

이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대통령은 그래도 복지예산을 몇 퍼센트 늘렸다면서 이른바 '복지정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런 기준에서는 영국에서 복지국가의 기반을 무너뜨렸다고 하는 대처정부도 '복지정부'가 될 수 있다. 대처 정부 아래에서도 어쨌든 복지예산은 증가했기 때문이다.

대처 정부 때도 복지예산이 증가했던 것은 실업 증가, 고령화, 전통가족 해체 등등으로 증가하는 사회적 요구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핵심은 사회적 요구에 비해 예산 증가분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노무현 정부도 복지정부가 되기는 힘들다.

우리나라에서 급속하게 진행되는 양극화·고령화· 비정규직 증가에 비해 그나마 증가했다는 복지예산의 규모는 초라하기 이를 데가 없다. 급증하는 사회적 요구에 비해 초라한 복지예산은 국민의 고통의 총량이 증가하는 결과밖에 나오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획기적 예산 증대가 어려웠다면 어떤 정책적 방향전환이라도 이루어 냈을까?

최근 정부가 추진 중인 '복지 정책'이란 고령화에 대한 유일한 대책인 국민연금을 더욱 깎고 국민의 권리여야 할 의료는 더욱 시장화시키는 것이었다. 복지정부라고 하기에는 낯부끄러운 것들 뿐이다.

한미FTA, 결정적인 보수의 길로

▲ 지난 4월 7일 오후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한미FTA 무효 범국민대회'에서 한미FTA 저지 범국본 대표들이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밝게 웃고 있는 '죽음의 동맹' 사진을 해머로 부수는 상징의식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대외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다. 이라크전 참전은 어쩔 수 없다 백번 양보한다 치더라도 북한 핵위기 등에서 나타나는 미국의 일방적인 한반도 정책에 대해서 독자적인 역할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의지와 상관없이 지역 분쟁에 휘말릴 수 있는 전략적 유연성에 전격 합의해주고 이를 위한 미군 기지이전에는 국민을 쫓아내고 국고를 지원해주고 있다.

국민의 민주적 선택에 대한 결정적인 배신은,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한미FTA였다.

보통 설문에도 많이 사용하듯이 우리나라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를 때 자주 사용되는 기준은 '유럽 북구형 사민주의 국가를 지향하느냐' '미국형 자유시장 국가를 지향하느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FTA라는 미국과의 경제통합 협상을 강행함으로서 미국형 자유시장 국가를 지향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을 뿐만 아니라 향후에 사민주의 국가를 지향할 수 있는 길마저 아예 봉쇄를 시도하고 있다.

우리나라 백여 가지의 법과 제도를 고쳐야하는 이 협정이 전면 시행된 이후 그 방향전환은 극히 어려워질 것이다. 이미 출발부터 통상협정에 한정하는 한-EU FTA는 한미FTA와 비교대상이 되지 못한다.

당신이 배신한 것은 지지자 뿐이 아니다

▲ 지난 2003년 2월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 주간사진공동취재단

이 때 노무현 대통령은 "지지자를 배신하면서 국가를 위한 결단을 내렸다"고 했지만 그가 배신한 건 지지자 뿐이 아니었다. 국민의 선택, 나아가 어렵게 쌓아온 민주주의 그 자체였다.

선거를 통해 그나마 진보적 '경향'을 선택했던 국민에게 분명한 보수의 극단을 보여주면서 한국 민주정치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정치적 선택 기준을 완전히 무력화시켜 버린 것이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열린우리당이 붕괴되니 '정계개편'의 꿈이 무너진다고 통탄한다. 이름부터 정치적 정체성이 매우 불분명한 그 정당 자체가 무슨 그런 큰 의미가 있었는지부터 매우 의문스럽다. 게다가 그에게 다른 사람을 탓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 꿈을 이미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자체를 무색하게 만든 것은 노무현 바로 그 자신이다.

 

- 2007년 5월 6일 오마이뉴스에 기고, 7일 메인탑으로 보도

 

보도본 보기: 실패한 노 대통령, 당신이 틀렸다

 

* 원래 다른 의견에 대한 절대적 부정을 뜻하는 '틀렸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진 않고, 노무현 대통령 자체가 실패했다는 얘기보다는 그가 꿈꾼 정계개편을 스스로 망쳤다는 것이 초점이었는데... 아무튼 오마이뉴스 편집진이 제목을 좀 선정적이고, 단정적으로 붙이는 바람에 본의아니게 상당한 논란거리를 만들어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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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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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책정당의 소멸과 지역주의 부활이 노무현 때문이라고?

    2007/05/14 18:40
    삭제
    정책정당의 소멸과 지역주의 부활이 노무현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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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만 탓하면 집권행위 자체가 부정됩니다

안녕하세요. 당일날 아침에 노무현 대통령의 글을 보고 하도 답답한 마음이 들어서 2시간이 채 안걸려 써서 올린 글인데 이렇게 과도한 관심을 받게 되고 또 이렇게 많은 반론을 받게되니 약간 당황스럽긴 합니다. 어쨋든 변변치 못한 글에 관심을 가져주신데 감사드립니다.

학술적 논쟁으로 받아주시길 원하신다니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온라인 신문 기사에 적합한 논쟁 형식인지는 모르겠으나 안그래도 유학생은 공부나하라는 애정어린(?) 댓글들에 살짝 찔려오던 중에 반갑기도 합니다. 저도 한 수 많이 배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지역주의 극복과 정계 개편 실패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1차적 책임을 묻는 저의 인식의 근원에는 '형성주의(맞는 해석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constructivism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를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국가 정책을 평가할때 그 평가에 대한 이론적 배경은 크게 환경(context)을 중시하는 입장과 주체(agency)를 중시하는 입장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근본적으로는 사회학적 논쟁이 되겠습니다만 지나치게 복잡해질 것 같아 사회정책학의 수준에서 한정해서 논의하여 보겠습니다.

환경을 중시하는 입장은 대표적으로 실증주의(positivism)과 제도주의(institutionalism)을 들수가 있겠고 주체를 중심으로 하는 입장은 최근 정치학 사회학 외교학 분야에서 부상하고 있는 언어학적 접근(linguistic approach)이나 신념주의(ideationalism에 대한 역시 나름의 번역입니다.)를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이 양측의 접근이 모두 현실 정치와 정책과정을 설명하는데 제한점이 더욱 크다고 생각하여 이 양측의 장점을 수용하되 변증법적 원칙을 적용한 형성주의가 가장 유용하여 이를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일단 실제가 아닌 언어만이 존재한다는 언어학적 접근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객관적 환경요소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다만 인간이 모든 환경적 조건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 역시 받아들입니다. 종합하면 모든 환경적 조건을 파악할 수는 없으되 주체(agency)는 자신의 신념과 가치에 따라 전략적으로 부분적 조건을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이렇게 전략적으로 이해되고 해석된 조건 위에서 주체의 신념과 가치에 따라 목표가 설정됩니다. 그리고 조건에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정책)들이 도출 되지요.

하지만 앞서 말한데로 모든 조건이 완전히 이해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략이 꼭 의도한 결과를 내지는 않습니다. 즉 ‘정책적 결과는 = 의도한 목표 + 의도하지 않은 조건의 영향’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주체는 가치와 신념이 있으되 전략적으로 사고하기에 그 정책적 결과는 다시 또하나의 조건으로서 이해되고 해석되어 다음의 전략을 발전시키는데 동원이 됩니다. 결국 ‘조건-전략적 주체의 행위(정책)-정책 결과’ 사이의 변증법적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론적 틀은 제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구의 매우 기초가 되는 중요한 기반입니다. 그러니 이에 대한 반론은 적극 환영하며 저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말하자면 '최고 권력자로서의 주체'가 되겠지요. 님이 지적하신 떳다방 정치인이나 지역당들은 노무현 '대통령' 이전에도 존재했던 '조건'입니다. 이를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신념과 가치에 따라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이해하고 해석하였으며 이에 따라 '정계 개편'이라는 목표를 설정하였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집권 기간동안 '정책'을 펼쳤던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그 정책적 결과(지역주의의 부활)를 목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과에 대해서 계속 '조건' 탓을 하면 그것은 결국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행위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셈입니다. 속된말로 누가 몰랐습니까? 한국 정치 현실이 그런 것을? 허구헌 날 조건 탓만 하려면 집권은 왜 했습니까? 그런 '조건'에 의한 실패는 '파악되지 못했던 조건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뻔이 알고 인식하고 있는 조건에 대해 추진한 전략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보수 언론을 탓하던, 야당을 탓하던 그것도 다 마찬가지 입니다. 그거 원래 있는 조건이었고 다 알고 있었던 조건 아닙니까? 그 조건 때문에 5년의 집권 기간 이후에도 여전히 실패 했다는 것은 그 집권 5년을 실패했다는 얘기입니다. 즉 그는 '실패'한 것입니다.

복지와 한미FTA가 진보와 보수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부분에서도 역시 '형성주의'적 입장에서 말씀 드려 보겠습니다. 즉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인식입니다. 노무현의 정치인의 실체가 아니라 그 정치인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인식되었느냐가 현실적으로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정말 노무현 개인이 어떠한 실체를 가지고 있는지 제가 그가 아닌이상 알수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궁금한 지점이긴 합니다만 말이죠.

그럼 지난 대선 당시로 돌아가 봅시다. 그당시 대통령 선거에 대한 정치적 구도는 보수-진보, 권위주의-민주주의, 외세의존 외교-자주적 외교, 개혁회귀-개혁지속 뭐 이런 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도는 노무현 후보측에서 적극적으로 설파한 프레임이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당시 이회창 후보측이 주로 설파했던 경험있는 지도자-어설픈 지도자와 같은 프레임보다는 노무현 후보측의 프레임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진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인식 구도는 계속 노무현 정부를 좌파라고 공격하는 조선일보나 한나라당 등과 같은 요소에 의해 확대 재생산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말입니다. 그 덕에 여전히 노무현 정부는 '진보'의 옷을 입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집권 5년 이후 나타나는 결과는 그 반대입니다. 양극화는 확대되고, 비정규직 차별은 확대되어 왔으며 그 비중은 증가하였고, 사교육 비용도 계속 상승하고 서민들은 더욱 죽을 맛입니다.

그럼 이러한 결과는 올바른 전략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했던 다른 환경요소에 의해 의도하지 않은 결과일까요? 문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전략 자체가 그 흐름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는 것이지요.

복지예산의 획기적인 확대까진 어렵다고 치겠습니다. 하지만 제도적 확대의 길은 IMF상황에서 김대중 정부도 어느 정도 이루어낸 사항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도 노무현 정부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지요. 한참 논의되던 근로소득공제제도(EITC)도 (개인적으로 크게 지지하진 않았지만 그나마도) 소리소문 없이 무산되었고, 최근 가장 주목할 만하던 제도적 변화였던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도 청와대의 무관심속에 제대로된 자원확보는 전혀 안된 상태에서 최소한의 수준으로 껍데기만 도입되었습니다. 극심한 국가제도에 대한 불신 속에서도 노인 부양에 대한 부담이 너무나 크기에 국민의 70% 가까이가 지지했던 제도가 말입니다.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국가를 통해 그 부담을 서로 분담하는 국민연금 제도는 미래세대 부담이 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냥 ‘깎았습니다.’ 그럼 국가를 통해 나눠주지도 않으면 그 부담은 어디로 사라진다는 얘기입니까? 마술이라도 부린답니까? 제도 안에서 개개인의 부담이 30%까지 치솟는다면 재원의 다양화를 통해서 해결해야 부담이 덜어지지 국가가 발을 뺀다고 해결될 리는 없는 것은 당연한 얘기지요. 이 개혁이 그대로 진행되면 향후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보일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이처럼 말로만 복지를 들먹일 줄 알았지 개개별 구체적인 쟁점에서는 ‘생각’조차 있었는지 심히 의심스러울 따름입니다.

사교육비 급증에 대해서도 노무현 정부 내내 시도했던 것들은 위성과외 등 기술적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꿀 시도는 일어나지 않았지요. 이른 점에서 그동안 수많은 이전 정부에서의 실패를 반복한 셈입니다. 이 부분은 그나마 아직 해답을 제시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해가 되어줄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 한미FTA입니다. 자꾸 옹호하는 분들을 이를 ‘개방’이라고 생각하는데 개방은 이미 WTO체제에서 7~80% 이루어졌습니다. 즉 FTA는 개방이냐 쇄국이냐라는 옹호자의 논리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닌 것입니다. 특히나 한미FTA는 통상차원이 아니라 경제체제 통합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은 ‘한미FTA를 통해 우리 경제제도를 개혁하겠다’라고 여러 번 강조 했던 노무현 자신의 발언에서도 여러 번 확인됩니다.

즉 결론적으로 한국 경제 체제를 미국식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미국식’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공공에 대한 시장의 철저한 우선주의입니다. 미국은 전국민 의료보험 조차도 없는 복지 후진국입니다. 공공보다는 개인이 우선하는 가치가 모든 시스템에 전제되어 있지요.

투자자-국가 소송제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투자자의 이익이 공공정책에 우선할 수 있는 것이지요. 노무현 대통령은 멕시코에서 실제 패소해서 변상한 금액이 얼마 안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이 제도로 인해 정책 고려 과정에서부터 투자자의 이익을 고려하게 되는 잠재적이고 더욱 포괄적인 공공의 비용을 무시한 협소한 단견의 소치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에서 투자자-국가 소송제에 제소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준비하겠다는 얘기는 정책 수립 과정에서 투자자의 이익을 매우 적극적으로 고려하시겠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제도가 전면 시행된 이후에 다른 대안을 추구할 공간이 협소해지는 새로운 ‘조건’이 형성됩니다. 단순한 제도적 시행에 그치지 않고 미래를 제약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로서 보수-진보의 프레임에서 진보적 선택으로 당선되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이처럼 보수의 극단을 선택함으로서 그나마 존재하던 선택기준을 붕괴시켰기에 ‘적어도’ 정계개편을 원하던 노무현 대통령의 꿈은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노무현은 그것을 열린 우리당이라는 ‘정당’으로 협소하게 보고 통탄하고 있다면 저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정치구도 측면에서 비판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A에 대해 B를 가지고 비판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근본적인 정치구도는 당연히 열린 우리당이라는 개별 정당을 포괄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쓰다보니 매우 길어졌습니다. 끝까지 읽으셨다면 감사드립니다. 전에 쓴 글과 걸린 시간이 똑같았네요. 길이는 배로 길어지고. 마치 전 기사의 해설판 같이 되어 버렸네요.

그럼 건승하십시오.

 
- 오마이뉴스에 2007년 5월 7일자에 기고한 '실패한 노 대통령, 당신이 틀렸다'의 반론 글 '실패한 노무현 비판, 당신이 틀렸다'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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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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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한민국 진보의 위기는 노무현의 보수화가 아니라 불량의견과 불량정치의 만연

    2007/05/14 18:37
    삭제
    대한민국 진보의 위기는 노무현의 보수화가 아니라 불량의견과 불량정치의 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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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와 진보는 여전히 중요한 기준입니다

정식으로 제기된 반론에는 답변하는 것이 예의인 듯하여 댓글로 남깁니다.

일단 먼저 말씀드릴 부분은 노무현 대통령을 '실패'로 규정하는 것이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실패한 노 대통령, 당신이 틀렸다'라는 다소 단정적인 제목은 제가 붙인 것은 아닙니다. 이 때문에 주목도는 상당히 높아진 듯하지만 개인적으로 논점에서 좀 벗어난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것이 아니면 편집진의 결정을 우선적으로 존중하는게 기자의 자세라 생각하여 별 이의를 제기하진 않았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보수와 진보는 여전히 국가정책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여전히 매우 중요한 기준입니다. 아무리 실용주의를 주장한다고 해도 아주 극단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정해진 상황에 대한 대안은 정치적 가치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국가의 정책적 방향은 집합주의적-개인주의적, 공공중심적-시장중심적, 보편주의적-선별주의적, 시민권적-소비중심적 등등 다양한 양분된 가치사이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물론 이러한 양분된 가치지향은 특정한 교조적 정책형태로 고정되어 있기 보다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실용적인 변형된 형태를 띄게됩니다.

여기서 실용적이라고 함은 가치가 배제되어 실용적이는 의미라기 보다는 가치에 따라 설정된 정책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실용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특정적으로 고정된 정책만을 특정한 가치에 연결시키는 태도를 '교조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가치에 기반하여 생산된 정책을 그 처한 상황에 맞게 실현가능성, 효과성 등으로 다시 평가될 수 있겠지요. 물론 그 평가의 기준은 그 정책적 가치에 의해 설정된,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에 따라 1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각각의 가치에 입각한 정책은 각기 다른 목적을 지니게 되고 기대하는 효과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영국 신노동당이 아무리 제3의 길을 간다고 해도 공공의 영역을 확장하되 시장의 원리를 적극 도입한 정책들은 선별적이고 소비주의적인 영향을 피할 수가 없게 됩니다. 즉, 영국의 대표적인 보편주의적 무상의료시스템인 NHS에 시장 시스템을 도입한 결과 지역별 의료 서비스 차이가 나타나고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이 급증하는 등의 보편주의 서비스내에서 조차도 시장주의적 문제점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일요일에 끝났던 프랑스 대선이 여전히 보수와 진보가 중요한 기준으로 남아있는 좋은 예중의 하나입니다. 사르코지는 현 프랑스의 상황에서 개인주의적, 시장중심적, 선별주의적, 소비중심적 대안을 선명하게 제시함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히했고 그를 기반으로 집권에 성공했습니다. 반면 그 반대 주자로 나섰던 세고렌 로얄은 그에 대척하는 보편주의적이고 집합주의적이며 시민권에 기반한 분명한 정체성과 명확한 대안을 보여주는데 다소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광범위한 사르코지에 대한 반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집권에 실패하고 말았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굳이 서구의 기준에 따를 이유는 전혀 없지만 그렇다면 우리 나름의 가치에 따른 정책방향은 정치권에서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민주주의적 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지요. 얼토당토 하지도 않은 출신 지역이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대안 사이에서 민주주의적 선택이 가능해진다는 말입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가 다양할 수는 있지만, 심지어는 일부 소위 자칭 보수들이 노무현 정부를 '좌파'라고 규정하는 코메디가 여전히 펼쳐지지만, 합리적인 수준에서 형성된 진보와 보수의 기준은 우리나라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그렇게 형성된 기준에 비추어 볼때 경향적으로 진보로 선택된 정부가 극단적인 보수적 정책적 선택을 함으로서 그 기반마저 크게 붕괴시켰다는 것이 말하고자 하는 지점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그래도 노무현 정부가 좌파라고 박박 우기는 소위 자칭 보수들 (우리나라에 제대로된 보수가 없다는 것은 한국 정치의 또하나의 불행이지요)의 논법에서는 통할리가 없겠지만 말입니다.
 
- 오마이뉴스에 2007년 5월 7일자에 기고 한 '실패한 노대통령, 당신이 틀렸다'의 반론 글 '국가의 정책을 진보-보수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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