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국현을 들어 이명박을 막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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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불교계 대선후보 초청토론회에 참석한 문국현과 정동영, 단일화에 희망을 걸어야 하나? 걸수 있는가? 사진@오마이뉴스 유성호



대통령 선거가 거의 2주앞으로 다가왔지만 후보등록이 끝난 지금도 후보가 확정이 안된 형국이다. 특히 범여권, 또는 개혁진영이라고 하는 쪽에서의 단일화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다가도 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한순간 돌아서는 듯 하다가도 다시 단일화 끈을 잡으니 이에대한 기대와 아쉬움은 생각보다 큰듯하다.

이는 꼭 그 진영 후보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닌 듯이 보인다. 오히려 목이 타들어가는 이들은 정치권외의 '개혁진영'인 듯 하다. 이른바 민주화 원로들이 하나둘 일어서 단일화를 외치더니 이어서 이른바 '진보진영' 학자들이 목소리를 보탠다. 전직 대통령까지 나서니 정치권 안팍의 압력은 가히 그 정점에 다다르는 듯 하다.

조만간 가타부타 결론은 날 것이다. 그러나 이 촉박한 시간에도 단일화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지난 대선 막판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로 대선구도를 반전시켰던 기억일 터이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외치는 이들에겐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이뤄온 민주정부인데 다시 독재잔당에게 정권을 돌려주는 것은 민주화에 몸바쳐온 이들에겐 다시 꿈꾸기 싫은 악몽일 터이다.

하지만 여전히 지금의 한국사회를 민주대 반민주로 규정하는 것은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이미 그렇게 이룩되었다는 민주정부의 대통령도 그 독재잔당과의 연정을 제안할 정도로 스스로 근본적 차이를 인식하지 않는다. 그리고 제도 정치권내의 소위 '개혁세력'은 더이상 '민주화'를 자기 소임으로 삼지도 않는다. 민주적 선거제도, 지역감정 해소, 부패청산 등 가장 협소한 범위의 '민주주의' 인식을 가진 현 제도권 '개혁세력에게는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민주화'로 새롭게 받아들이지 않는 한 더이상 '민주화'할 거리도 남아있지도 않다.

그리고 한나라당이 집권을 한 들 이들 집권 '민주화 세력'이 구축해 놓은 정치적, 제도적 수준의 민주화가 당장 후퇴할 것이라는데도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현 대통령 후보은 거의 부정비리 백화점을 차릴 수준이지만, 그리고 그러한 배경이 결국 집권후 권력형 비리에 휘말릴 가능성을 크게 하지만 그런 비리와 부정이 벌어지는 것이 사회적으로 용납될지는 다른 문제이다. 검찰도 독립적 자기 권한에 맛들려 통제가 쉽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의 비리라도 터져나오는 순간 다시 우리사회가 권력형 비리가 만연한 사회로 돌아가기 보단 집권세력의 정치적 기반이 급속하게 잠식될 가능성이 크다.

또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한반도 평화가 무너지고 전쟁위기가 다가올 것이라는 주장도 고개를 끄덕이진 않게 된다. 이미 지난 10여년 간의 남북관계 진전으로 어느정도 안정화를 이룬 이 상황에서 섣불리 남북관계를 건드려 긴장을 높였다간 당장 경제부터 타격 받을 것이 뻔한 걸 두고 가뜩이나 경제에 국민들이 민감한 이 판국에 쉽사리 현재의 안정을 건드릴 정신나간 집권세력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때문에 이명박이 전향적 자세를 취했다가 원조보수를 주장하는 후보가 출현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말았지만 이와 같은 상황의 뒷배경에는 집권을 바라보는 세력의 어쩔 수 없는 타협이 존재했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 우리사회는 새로운 조건에서 새로운 단계의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양극화와 고령화가 그것이고 국외적으로는 국제관계의 다극화, 기후변화, 자원고갈 등이 그것이다. 그나마 가장 정치적으로 인식되어 있고, 내재적 위기의 핵심인 양극화만 살펴봐도 이 것이 가져올 사회적 타격이란 그 끝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이다. 국가주도 경제개발 패러다임이 97년 경제위기를 마지막으로 종말을 고하고 세계화가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으로 급격히 전환된 이후 급증하기 시작한 양극화는 그 이전까지 불평등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를 불러오고 있다.

해방과 전쟁이후 황폐화로 비교적 동등한 조건에서 모두 출발했던 한국 사회에서는 한반도 체재경쟁 덕에 가능했던 철저한 보호주의 속에 추진할 수 있었던 국가주도의 경제개발 구도에서는 제아무리 독재체재 아래이고, 사회복지가 열악했더라도 불평등 정도가 오히려 계급사회가 정착된 서구 복지국가에 비해 결코 질적으로 나쁘지 않을 정도 였다. 그것이 또한 교육으로 인한 계급상승의 기대를 가능하게 했고 경제가 성장함과 동시에 교육에 대한 욕구도 전계급에 걸쳐 덩달아 상승하여 불평등에 대한 불안을 흡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제위기 이후 이러한 사회적 완충장치는 빠르게 붕괴되고 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체제아래 경쟁은 심화됨에 따라 교육에 대한 사적인 지출도 덩달아 상승하지만 이제는 계급상승의 기대라기 보다는 생존의 몸부림이 되어가고 있다. 그마저도 이제 정점에 다다라 보통 중산층 가정이 맞벌이에 투잡 쓰리잡을 하더라도 따라잡을 수 있는 비용을 초과하기에 이르렀다. 더더군다나 전체 노동시장의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등 차별이 더욱 극심하고 보편적으로 확대된 상황에서 이 세대가 가정을 꾸리기고 상대적 안정을 누렸던 부모세대가 은퇴하기 시작할 때 쯤이면 계급분화는 더욱 고착화되고 이젠 자녀교육으로 인한 사회적 생존의 기대마저 박탈되게 될 것이다.

여전히 복지수준은 OECD최저 수준으로 열악하여 어느정도의 재분배 및 사회보장 등 다른 대체적인 사회적 완충장치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교육을 중심으로한 전통적인 완충장치가 붕괴시점에 이르게 된다면 불평등에 따른 사회적 불안은 여과없이 폭력적으로 표출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그 시점을 상상하는 것조차 두렵다. 사회적 계급화가 고착화되었지만 이로 인한 사회불안을 완충시킬 복지제도를 갖추고 있지 않은 남미에서 벌어지는, 만연한 마약거래, 일상화된 총격사고, 폭동, 국지적 게릴라전 등등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사회적 재앙은 이제 실질적인 문제들로 다가오게 될 수도 있다.

설마 설마 하지만 최근에 한국에서 방문한 친구, 친지들과 이런 얘기를 나눌 수록 이런 우려는 더욱 커지게 된다. 양극화 진행에 따른 폭력의 일상화에 대한 걱정을 털어 놓을 때 마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는데요"라는 대답이 거의 입을 맞춘 듯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한미 FTA에서 드러나듯이 현 집권세력조차 이러한 사회문제 앞에서 더욱 강화된 신자유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이상 이러한 사회적 흐름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경제위기때는 IMF가 있어 강제적이었다지만 OECD국가들 중에서는 미국 주변국밖에 맺지않은 미국과 FTA를 자발적으로 맺고 현재 한나라당이건 범여권이건 모두 이를 찬성하는 상황에서 누가 집권하던 이와 같이 심화되는 위기가 반전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기는 더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후보 당선이 그나마 가장 두려운 시나리오인 이유는 그의 교육 정책 때문이다. 사람들이 교육 교육 하는 것은 앞서 말했 듯 그나마 최후의 완충장치로 남아있기 때문인데 300여개의 특수학교를 세우는 등 가뜩이나 감당 수준의 넘은 사교육 비용에다가 그나마 남아있던 평준화 체제마저 붕괴시킨다면 한세대 걸쳐 직면할 사회적 붕괴 위기를 단 5년안으로 앞당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만큼 교육이 위기의 핵심고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범여권 후보가 되면 달라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기의 징후는 전환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정동영 후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고 하고, 사람중심 경제를 주장하는 문국현 후보 조차도 패러다임을 대체할 만한 프로그램은 거의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향후에라도 보완할 조직적 기반이 있는 것도 아니다. 범여권에 누가 되던 현 노무현 정부의 운명과 달라질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말과 이미지가 앞서되 내용과 세력이 받쳐주지 않는 것은 매 한가지 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처음에 그토록 기대를 모았던 문국현 후보가 여전히 저조한 지지율을 벋어나지 못하는 것도 일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이 한번 속지 두번 속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 누가되던 상관없나? 이른바 '개혁진영'의 단일화 외침에 마냥 고개를 돌리고 있지 못하는 이유는 범여권이 어떤 새로운 변화의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가져올 사회적 위기의 가속 효과가 너무나 어마어마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도 제대로 내용을 갖춘 정치세력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사회 전체적으로 내용이 달리는 것의 반증이기도 한데 새로운 패러다임이 제시될 수 있는 시간조차 벌지못하고 사회적 위기의 임계점을 맞게 된다면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상황이 절망적이 될 수 있다.

그럼 단일화에 희망을 걸어야 하나? 그러기도 힘든 것은 이명박을 막는 다는 네가티브한 의미의 단일화로는 이 구도를 뒤집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언가 이 상황을 어떻게든 타계하길 바라고 있는 상황에서 BBK가 심각히 터진다 한들 다른 대안이라는 포지티브한 것을 범여권이 보여주지 않는 한 현 집권세력과 같은 부류로 분류되는 현실에서 범여권으로 표가 돌아오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업친데 덥친격으로 그래도 희망이라 생각했던 민주노동당은 자기 정체성에서부터 헤매고 있으니 도대체 표를 던지기 조차 민망해진다. 이래저래 마음만 괴로운 대선이다. 외국에 나와 있어 투표장에 갈 부담이 없다는 것을 위안이라고 삼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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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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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국현이 그냥 '단일화' 했다면, 나는 지지를 철회한다

    2007/12/04 13:42
    삭제
    앞의 글에서 문국현 후보가 정동영 후보에게한 제안을 전했습니다. 부패한 세력의 집권을 저지하기 위해서 '두 사람중에 한 사람'을 뽑기 위한 토론회를 제안했다는 이야기였는데요. 그 글에서 저는 이런 문국현 후보의 선택이 "현재 시점에서 문국현 후보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제안"이라고 밝혔습니다. 퍼즐맞추기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국현 후보의 제안은 '단일화'가 아니라, '대표선수'를 뽑자는 제안인데요. 여기에 정동영 후보의 동행 블로거께서 "문국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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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멍구
    2007/12/04 17:13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김경준씨가 검찰 수사를 받던 과정인 11월23일 검찰청 조사실에서 장모(이보라씨의 어머니)에게

    써준 메모지를 단독으로 긴급 입수했다. 여기에는 검찰이 이명박 후보에게 유리한 진술을 해주면

    김씨의 형량을 낮춰주겠다는 제안을 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서툰 한글로 쓰여 있다

    www.blddong.com 에서 정확한 개요를 확인해보세요~!
  2. 2007/12/04 18:41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모든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늦게 인사드립니다만, 올려주시는 글 늘상 잘 읽고 있습니다. :)
    • 2007/12/04 20:14
      댓글 주소 수정/삭제
      이국땅에서 혼자 답답한 마음에 말그대로 주절주절 쓰는 글인데 관심가져주시니 감사합니다. ^^;;
  3. 우리아빠
    2007/12/17 19:40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선거가 이틀남은 오늘 명바기가 될꺼 같다는 두려움에... 애혀...
    하여간 잘 보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친일파의 닮은 꼴

- 그들의 변절은 신념이었다

 

한미FTA가 기어이 타결됐다. 개방의 새 시대를 열었다는 둥, 새로운 통상시대가 열렸다는 둥 장밋빛 수사들이 쏟아진다. 몇 천억이니 몇 조니 벌써 우리 손에 금은보화가 들어온 양 큼직한 숫자들이 언론에 난무한다. 그러나 기실 산업별 전망들을 찬찬이 살피다 보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숫자들이 튀어 나왔는지 그 근거를 찾아볼 수가 없다.

최대 수혜 분야가 자동차와 섬유라지만 오히려 <블름버그 통신> 등 외신들은 "실질 수혜자는 이미 미국 내 공장에서 수출차량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현대가 아닌, 미국에서 생산한 차를 한국으로 수출하는 데 혜택을 누릴 도요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 놓는다. 대부분의 원사를 중국에서 수입하는 섬유분야에서는 달랑 5개 품목을 제외하고는 중국산으로 취급받아 FTA에 따른 혜택도 못 받을 전망이란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에서는 이런 당장의 손익계산 보다 더 큰 뜻이 있는 듯 보인다.

주요 외신에는 볼 수 없는 한국 언론의 장밋빛 환상

노 대통령과 정부관계자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한미FTA는 우리가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며 미국과의 적극적 결합을 통해 우리사회가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춰 발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해왔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강대국 일본과 적극적 결합을 통해 우리도 일본처럼 될 수 있다던 친일의 논리, 바로 그것이었다. 동시에 대통령 선거 때도, 탄핵 때도 노 대통령의 우군이었으나 지금 배신에 치를 떠는 사람들을 볼 때 일제 강점기, 소위 민족주의자들을 따르다가 그들의 변절에 치를 떨던 우리네 선조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얼마전 출간된 박노자의 '우승열패의 신화'를 보면서 먼저 든 생각은 우리가 '변절'했다고 말해왔던 그 친일파들도 스스로의 논리에서는 변절이 아닐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즉 개화파들이 일본의 철학자에 의해 양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을 자신의 철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면서, 결국 그 연장선상에 있었던 소위 '민족개조론자'들의 최종 결론은 '내선일체' 즉, 일본과의 합일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이미 강자가 약자를 약탈하는 것을 정당화 하는 논리인 양육강식의 철학을 받아들인 그들은 일시적으로는 우리도 '강자'가 되자면서 계몽운동이니 실력양성 운동이나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강자가 되긴 어렵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땐 강자와의 결합만이 우리의 살길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겉으로 보면 용납될 수 없는 '변절'이지만 그것은 그들 철학 속에서는 신념에 따른 '선택'일 수 있었던 것이다.

민족을 배신한 민족개조론자들과 민주주의를 배신한 노무현

노무현 대통령이 이전에 마치 진보의 표상인 것처럼 떠올랐던 것은 민주화 운동 당시 인권 변호사의 경력이었다. 그리고 지역감정 해결을 위해 자신을 던질 줄 알았던 그 결단력이었다.

노 대통령의 민주화 경력은 그가 나은 사회를 위해 개혁을 추진할 것이라는 기대를 낳게 만들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거기까지였다. 자신이 싸워왔던 권위주의와 지역감정을 없애는 것까지가 목표였다.

그 빈 공간을 채운 것은 미국이었다. 권위주의가 해체되다 못해 공공의 영역까지 해체되어버린 살벌한 경쟁의 세계, 그래서 살아남은 자가 화려한 독식을 즐기는 세계의 이상이 그의 빈 철학을 채웠다. 국가는 그 경쟁의 공간만 잘 만들어 주고 너무 잔인하지 않을 만큼 패자들만 챙겨주는 존재일 뿐이다. 이러한 철학은 노 대통령이 FTA 타결 후 대책과 관련된 발언과 정확히 일치한다.

지지자들이 보면 변절이요 배신이겠지만, 민주주의의 형식적 완성에 집착했던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국가의 역할을 제도적 민주주의 보장과 시장제도 확립에만 제한하는 미국 신보수주의자들의 철학과의 결합이 자연스러운 결론인 것이다.

그 결합 속에 미국식 시장제도를 완벽히 이식시키는 것을 정권의 사명처럼 여기는 생각은 스스로에게 모순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신념이었고 그래서 그는 특유의 결단력으로 추진했고 스스로에게 부끄러움도 없다.

일제 말기 소위 민족주의자라고 했던 친일파들은 결국 우리네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모는데 앞장섰다. 그들 스스로는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는 확신범들이었지만 민족의 청년들을 죽음으로 내모는데 앞장설 만큼 스스로 병들었던 것이다. 그들의 병든 눈에서는 망해가는 일제의 마지막 발악도 보이지 않았다. 이는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이다.

병든 친일파의 눈에 일제 최후의 발악이 안보였던 것처럼...

민주화 경력을 자랑했던 노무현 대통령도 자신의 신념을 추진하면서 기초적 민주주의 절차조차 무시하고 기본적인 정보부터 봉쇄한 채 철저하게 독단으로 일관했다.

그가 그렇게 닮고 싶은 미국도 다양한 이해집단의 수많은 논의와 압력을 뒷심으로 두고 협상할 때, 노무현 정부는 다른 목소리에게는 기본적인 집회와 시위의 자유마저도 간단히 짓밟아 버렸다. 그만큼 그의 민주주의도 그렇게 병들어 버린 것이다.

미국과의 완전한 결합이 우리를 선진국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강한 신념에 사로잡힌 그의 눈에는 그동안 미국과 FTA를 체결한 개발도상국 중 선진국 된 나라가 단 하나도 없다는 단순한 사실도 보이지 않는다. 미국 시장이 현재 세계경제의 가장 큰 불안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도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 단 하루의 중국발 주가폭락이 세계경제를 크게 흔들리게 만들었었다. 그 원인은 정작 중국이 아니라 중국발 쇼크가 미국의 거품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세계 경제주체들의 불안감이었다는 것은 가디언, 타임즈 등 세계 주요 언론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자신이 추구했던 민주주의도 잊은 채 자신의 독선적 신념에 따라 달려가는 대통령에 의해 끌려가고 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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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자유의 덫'과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덫'

- 아담 커티스의 새 BBC 다큐와 한국의 민주주의

 

▲ 아담 커티스의 화제의 새 다큐멘터리 시리즈 '덫: 우리의 자유의 꿈에 무슨일이 있었는가'의 제목 화면
ⓒ BBC
이미 칸 영화제에서도 상영된 <악몽의 권력(The Power of Nightmares)>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아담 커티스(Adam Curtis)가 새로 만든 화제 다큐멘터리 시리즈 <덫: 우리의 자유의 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The Trap: What happened to our dream of freedom)>가 지난 일요일 BBC2에서 3부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미 <악몽의 권력>에서 테러의 위협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유발된 환상(politically driven fantasy)으로 성립되었는가를 심도 있는 분석으로 보여준 바 있는 커티스는 이번 다큐에서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상을 바탕으로 한 협소화된 자유주의 철학이 어떻게 사회정치적으로 확산되어 결국 우리의 자유를 도리어 옥죄고 있는가를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서구사회의 '자유의 덫'과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덫'

물론 이 다큐멘터리는 주로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유사한 경로를 따라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에 비추어볼 때 어떻게 민주화된 정부가 왜 오히려 불평등을 촉진시키는 신자유주의에 철저히 복속해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함의를 제공하고 있다.

커티스의 분석은 2차 대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 대공황과 두 차례 세계 대전 등 극심한 혼란의 시기를 겪은 서구 사회는 2차 대전 이후 더 이상 똑같은 혼란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유럽의 복지국가와 같이 국가가 사회에 적극 개입하는 체제를 성립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로 양분된 세계에서 공산권을 예로 들어 국가 개입은 결국 폭정을 나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하이에크 등 일련의 학자로부터 제기 되기 시작된다. 공공의 개입보다는 자유로운 개인의 이성적 선택을 신뢰하는 이 같은 주장은 냉전으로 인한 갈등과 경제적 불안정이 심화 될수록 점차 힘을 얻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핵무기 전략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게임 이론'이다. 이기적이고, 격리되어 있지만,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을 전제로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하는 게임 이론은 상대의 행동을 예측하여 극단적인 상황을 막아야 했던 핵전략 분야에서 큰 권위를 얻게 된다. 게임이론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존 내시(John Nash)는 이를 전 사회에 적용 시켜 이기적인 인간의 자유가 혼란을 주기 보다는 지극히 합리적인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을 설파한다.

또한 철학자 벌린(Berlin)은 '자유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이란 강연에서 '적극적 자유(positive liberty)'와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란 개념을 정립시키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소극적 자유'임을 천명한다. 소비에트 혁명을 경험하고 피신한 그는, 사회적 정의, 평등 등 무언가 이상을 가지고 추구하는 '적극적 자유'는 결국 정치적 지도자가 설정한 이상을 사람들에게 강제하는 폭정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억압과 제약으로부터 개인을 자유롭게 하는 '소극적 자유'를 추구할 때만이 이같은 비극을 피할 수 있다고 설파한다.

이같은 철학이 신보수주의 세력 등을 통하여 정치, 외교, 사회 전반에 침투되면서 신뢰와 연대, 이타주의 등에 기초한 사회 체제는 이기심, 경쟁, 의심, 상호감시 등을 전제로 한 체제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 같은 체제는 시장이라는 기제를 통해서 조화와 안정을 이룰 것으로 기대가 되었지만 결과는 그 반대로 나타난다.

▲ 영화 뷰티플 마인드의 실제 주인공이자 게임이론으로 노벨상을 받은 존 내시. 내시는 이 다큐멘터리의 2부 인터뷰에서 '인간의 합리성에 너무 의존하면 안된다. 이것이 나의 깨달음이다'라는, 인간의 이기적 합리성에 기초한 자신의 게임이론의 근본을 흔들 수 있는 결정적인 발언을 한다.
ⓒ BBC
'소극적 자유'에 의한 개혁, 오히려 권위주의 부활시킨다

제프리 삭스 등 최고의 경제학자들이 러시아에 자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투입이 되었지만 일시에 각종 국가 규제와 개입을 철폐 시켰던 '충격 요법(shock therapy)'은 극심한 혼란을 불러왔고 결국 러시아 국민은 푸틴이라는 권위주의적 통치자를 선택했다.

냉전시절부터 '적극적 자유'를 지향하는 제 3세계 혁명이 확산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소극적 자유' 진영은 벌린이 적극적 자유의 재앙이라고 지적했던 '폭력'을 사용하여 '소극적 자유'를 전파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는 '소극적 자유'의 적대세력 만을 양산시키고 테러위협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이를 막기 위해 오히려 자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제들이 양산된다.

'소극적 자유'에 물든 정치인들은, 좌파 정치인 조차 정부의 역할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더 이상 적극적인 공공정책은 추구하지 않으면서 공공 서비스 내에 각종 경영 관리 기법을 도입한다. 인간의 이기심을 전제로 한 이 관리 기법들은 더욱 촘촘한 통제와 감시를 부르고 만다. 시장의 확산에 따라 불평등은 확산되고 결국 인간의 자유는 그토록 자유롭고자 했던 계급과 통제와 감시의 '덫'에 갇히고 만다.

▲ 인간은 언제나 당신을 배신할 것이다.
아담 커디스는 이번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기적이고 의심하고 배신하는 인간의 본성을 전제로한 협소한 자유의 개념은 잘못되었으며 이것이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 BBC
서구의 '소극적 자유'와 우리나라의 '절차적 민주화'

이 다큐는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에서 있었던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 논란을 떠올리게 한다. 주로 재야 민주화 세력은 근본적인 사회 경제적 개혁을 동반하여 보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주장한데 반하여 제도권내 민주화 세력은 직선제 등 절차적 민주화를 주장해왔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민주적 제도만 성립되면 나머지는 자유롭고 합리적인 인간들이 합당한 선택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라는 '소극적 자유'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즉, 90년대 초반부터 집권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형식적 민주화 세력'이 초반부터 세계화를 주장하면서 '소극적 자유'에 기초 한 신자유주의적 사회 경제 모델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어떠한 지향과 이상을 제시하는 '적극적 자유', 즉 '실질적 민주주의'와는 달리 '소극적 자유', 즉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떠한 비전도 제시하지 않는다. 유일한 지향이 있다면 '형식적 민주화'를 완성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이는 왜 노무현 정부가 민주화 이후의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고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진하기보다 그토록 탈권위주의, 지역감정 해소 등 형식적 민주주의의 완성에만 집착을 해왔는가를 잘 설명해 준다.

후퇴한 민주주의의 꿈

이처럼 형식적 민주주의 개념에 갇혀 있는 집권 민주화 세력이 종국에 소극적 자유의 본산인 미국과의 완전한 결합, 즉 한미FTA를 추진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론일지도 모른다. 그 들이 형식적 민주주의의 덫에 갇혀 있는 동안 시장은 전면화되면서 양극화 확대, 비정규직 확산, 사교육비 폭증 등으로 사회적 불평등은 심화되어 국민의 실질적 민주주의는 오히려 박탈되어가고 있다.

결국 민주화의 과실은 특권층에게 돌아가고 삶이 더욱 팍팍해진 서민에게 더 이상 절차적 민주주의는 그 의미조차 상실되어 박정희와 같은 독재자를 그리워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러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목격되었던 민주주의의 후퇴현상이 우리나라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그토록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우리 사회가 협소한 민주주의에 갇혀 결국 민주주의 후퇴과정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의 민주주의 꿈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 2007년 3월 27일 오마이뉴스 기고, 29일 메인탑으로 보도

 

보도본 보기: 덫에 빠진 노무현 정부의 민주주의

 

* 밑의 글에서 이 다큐멘터리의 전체 내용이 잘 요약된 서론부를 번역문과 함께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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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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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 사태와 개발독재 이데올로기

하도 과학은 과학자가 검증해야 한다고 하니 과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하번 이번 황우석 사태에 대해 사회적으로 검증해보고자 한다.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이야 과학의 몫이다 하더라도 이번 황우석 사태는 엄연한 사회적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취재윤리위반에 대한 폭로로 MBC 잦아들자 이른바 보수언론이나 경제신문들은 황우석과 삼성을 비교하는 웃지도 못할 기사까지 써대고 있다. 하지만 둘간의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확연히 드러난 개발독재 이데올로기의 수혜를 톡톡히 입고있다는 것이다.

개발독재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성장' 있다. 번영이 모든 문제에 우선하며 또한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것이다. 민주고 인권이고 평등이고 성장의 이른바 낙수효과(trickling down effect)' 모두를 윤택하게 것이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성장' 위한 전략은 자원의 소수 집중이다. 성싶은 소수에게 자원을 몰아줌으로써 효과를 극대화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 전략으로서 재벌이 출연한 것이다. 소수 기업에게 자원은 물론 각종 특혜와 지원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성장의 동력을 극대화 한다는 것이다.

전략은 역사적으로 성공했다. 우리 사회는 경험적으로 이데올로기가 입증된 것이다. 경제는 성장했고, 객관적인 삶의 질은 높아졌다. 과정에서 저곡가 저임금 정책 소수에게 자원을 몰아주기 위해서 다수의 희생을 강요했었지만 결과적으로 '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목표는 달성 것이고, 다수의 국민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것이 현재까지도 우리사회가 박정희 향수에 젖어있는 실질적인 이유이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성공이 모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는 성과의 배분이 필요한데 성장을 위해서 소수에게 자원을 집중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데올로기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고속성장이 필수적이다. 성과의 매우 작은 부분만 '낙수'한다면 몫이 커지기 위해서 전체적인 절대 성과의 크기가 훨씬 커야 자원의 소수 집중과 낙수효과 동시에 존재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배분되는 작은 성과의 실제적 가치는 매우 작아지고 결국 낙수효과는 실질적으로 일어나지 않게된다.

IMF 이러한 모순을 드러나게 해주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숫자상 성장수치는 되돌아 갔지만 그에 비해 내려오는 몫은 크게 줄어든 것이다. , 이전의 이데올로기가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고용없는 성장' 말해주듯 몇개 기업이 나간다고 해서 실업이 해결되지도 않고 가계수지 또한 나아지지 않는다. 그리고 새롭게 도전받는 사회적 위기들을 대처하는데 근본적인 한계또한 드러내고 있다. 걷잡을 없이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와 출산율 저하, 끝없이 치솟는 교육비용, 노동수급 불균형과 실업, 농촌의 붕괴 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음에도 근본적인 사회적 대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개발독재 이데올로기의 또다른 약점, '공공성의 부재'에서 크게 기인한다.

, 개발독재 이데올로기는 철저하게 '개인'에게 책임을 돌린다. 가난은 물론 이고, 각종 사고 불행 등도 모두 개인에게 책임을 돌린다. 반대로 성과 역시 모두 '개인'에게 돌린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치열한 경쟁속에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살아남은 몫은 개인 것이기 때문에 개개인은 성공을 위해서라면 갖은 희생을 마다하지 않게되는 것이다. 개발독재시절 수없이 존재하는 자수성가의 신화는 이를 정서적으로, 경험적으로 뒷받침 하고 있다. 그만큼 어떠한 성과를 개인이 독점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이는 소수에 대한 자원의 집중을 정당화 했다. 대신 누구나 당하는 '사회적 위험'이라도 공동으로 해결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위험을 피하는 것은 순전히 개인 몫이고 그래서 살아남는 또한 역시 개인 몫일 뿐이다.

따라서 성장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개개인에게 낙수되는 것이 줄어들고, 책임을 개인이 떠안다 보니 개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 몸집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회적 재생산인 출산을 포기하게 되고 전통적인 가족부양도 힘들어지게 된다. 전통적인 가족부양 체제가 붕괴되어도 사회적 보호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노인계층은 가난으로 몰리고 가족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 거기에서 살아남으려면 죽으나 사나 경쟁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자식에 대한 교육 비용은 치솟고 아이들은 밤새 경쟁에 시달려 인생을 아예 포기하는 자살은 늘어만 간다. 교육 비용의 상승은 다시 가계의 부담으로 들어와 부모는 또다른 희생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자원의 소수집중은 달라지지 않는다. 사회적 문제를 위한 사회적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경제성장율이 회복되어도 고용은 늘어나지 않고, 불평등은 심화되어 간다. 고속성장을 배경으로 OECD중에서도 낮은 수준이었던 불평등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시장개방으로 농촌이 붕괴되어도 '공산품 수출을 위해서는 어쩔 없다' 논리만 횡행할 뿐이다. 농촌의 붕괴가 사회적으로 또다른 부담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인식조차 안되는 듯하다.

경제 패러다임 변화로 인한 가계수지 악화, 고령화로 인한 사회적 부담 증가, 교육경쟁 비용 증가, 사회 양극화, 실업 증가, 농촌 붕괴, 모든 것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개개인의 부담 증가 요인만이 존재하고 탈출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심화될 수록 개개인의 삶은 날로 악화되고 사회적 위기는 심화될 수밖에 없다. 이때문에 악순환의 탈출을 위해서는 근본적인 공공의 대처가 필요한데고 취약한 사회적 공공성은 이를 출발부터 어렵게 하고 있다.

개개인은 공공의 해결보다는 살아남기 위한 경쟁의 심화로 해결하려고 든다. 어른은 투잡, 쓰리잡으로 아이들은 강도높은 학습으로. 국가는 문제 해결자로서 스스로를 인식하지 않는다. 단지 그동안 해왔던 조정자, 규제자로서의 인식만 뿐이고 변화된 패러다임에서는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속에서 해결의 조짐이 있을리가 없다.

이번 황우석 사태는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회전체가 개발독재 이데올로기에 얼마나 심각하게 갖혀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황우석 박사가 세계적 성과를 내었다. 이에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자랑스러워 하는 것은 IMF 박찬호, 박세리에 대한 2002년에 월드컵에서 느꼇던 감정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국익, 성장이라는 논리가 결합하면서 문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모든 조건이 안좋은 침체된 상황에서 희망의 메세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계적인 성과와 국익, 그것은 잃어버린 알았던 '성장신화' 재현이었다.

개발독재 이데올로기에 익숙한 언론과 정치권은 본능적으로 찬양하기 시작했다. 침제된 국민의 희망메세지로 말이다. 논리 안에서는 침체에 빠질 우리 모두를 구제해줄 구세주의 메세지였다. 하나의 성공이 모두에게 번영으로 돌아왔던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변화된 패러다임속에서 자원이 어떻게 배분되는가에 대한 전제없이 이제 가능한 일이 아니게 되었음에도 성공신화 앞에서는 그것 아니라, 윤리, 인권, 세계적 기준 등은 쓸데없는, 거론할 가치가 없는 문제로 치부되었다.

따라서 PD수첩의 보도 이후 박사가 줄기세포허브 소장직을 사퇴했을 불길처럼 일어난 저항은 '희망의 메세지' 강탈당한 것에 대한 본능적이고 정서적인 저항이었다. 그만큼 개발독재 이데올로기와 국민적 경험은 체내화 되어잇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오히려 비판이 향후에 도움이 된다' , 언론의 비판기능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둥의 목소리는 이미 이성적 토론의 대상이 수없었다. 희망의 강탈에 대한 정서적 분노가 모든 것을 지배했다.

결국 더이상 개발독재 이데올로기는 답을 주지 못하는 데도 그에 젖어있는 대중은 이데올로기 상의 메세지에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변동에 의해서 이전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효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토록 정서적으로 신봉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직까지 대체할 이데올로기가 출현하고 사회적으로 경험된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주화 되었다고 말하지만 민주화는 '절차의 논리' 뿐이다. , 개발독재 시절에는 '민주화' 모은 문제를 해결해줄줄 알았다. 그도 그랬던 것이 모든 사회문제를 가로막는 것은 한곳에 집중된 독재권력 그것과 모두 연결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만 제거가 된다면 모든 문제는 모두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회가 민주화 되면서 문제를 해결되는 것이아니라 '드러나게' 되었다. 독재에 꾹꾹 눌려있던 것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주화된 절차'아래서 해결방안이 논의되어야 한다. 하지만 ''독재 투쟁에만 집중하던 세력은 반대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대안을 창출하는데는 대단히 미숙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정부때 '성장과 분배는 함께 가는 '이라는지 '생산적 복지'라든지 하는 다소 대안적 논의가 있었지만 지금 확인되듯이 그것은 철저하게 김대중이라는 '개인' 기대있는 것이었지 의미있는 정치적 세력의 대안으로서 작동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속속히 수면위로 올라오는, 민주화된 세상에서 새로운 대안에 의해 해결되어야 이런 문제들이 방치됨으로 인해 어려움은 깊어지고 혼란만을 느끼게 된다. 이런 와중에도 대안생산의 역할을 해야할 정치권은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을 뿐아니라 그것이 자기 역할이라는 점조차 인식을 아직도 못하고 있다. 이는 보수나 진보나 한가지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대안의 부재 상태에서 국가권력은 민주화된 정치적 권력인 대통령과 의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료집단에게로 돌아가 버렸고 그들은 각자의 이해와 관성에 의해 일을 처리할 뿐이다. 대안과는 당췌 거리가 멀다. 관료적 집행형태는 여전하고 개혁을 한다고 하면 자기 예산 불리기에 1차적인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패러다임의 변화, 사회정치적 혼란, 경제적 어려움, 대안의 부재가 곂치니 사회적으로는 목표도 확실했고, 성과도 분명했었던 개발독재에 향수를 느낄 법도 했던 것이다. 정확하게는 그동안 축적된 민주화의 경험으로 독재의 귀환은 원하지 않더라도 개발독재 이데올로기의 메세지에는 매우 목말라 있던 것이다. 그런 와중 황우석 박사는 메세지가 되었던 것이다. 세계적 성과, 막대한 국익, 그리고 가치적 영역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과학자'라는 점이 겹치면서 마음껏 숭배하고 희망의 메세지를 만끽할 있는 대상을 만난 것이었다.

물론 우상이 우리 사회의 위기를 해소해주지 못한다. 그저 정서적 위안의 역할이라면 모를까. 그런 점에서 황우석과 박지성의 사회적 의미는 같을 뿐이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새로운 대안이고 그것은 개발독재 이데올로기를 대체할 있을 정도로 명확한 비전과 실천 전략과 실질적 효과까지 기대할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한 황우석이 아니더라 하더라도 대중은 끊임없이 숭배할 우상에 목말라 것이고 그런 와중에 농민이 죽어가든 비정규직 문제가 어떻게 되든 사회적 위기에 대한 논란은 묻혀질 수밖에 없으며 대중의 삶은 계속 악화만 되고 진짜 희망은 갈수록 희미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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