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표지 사진@인간사랑
영국으로 유학을 오기 전만 하더라도 나에게 제 3의 길이니, 신노동당(New Labour)이니 하는 것들은 그냥 진보를 참칭하는 사이비쯤일 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신노동당이 집권한 영국의 현실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영국 정치와 정책에 대한 나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결국 영국에 대한 나의 논문 주제도 사회복지 서비스에서 정치사상 영역까지 확장되는 등 신노동당의 존재가 지난 5년간의 나의 유학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다.
물론 미리부터 밝혀두지만 그렇다고 내가 제3의 길과 신노동당의 열렬한 신봉자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처음에 마냥 신기했던 그들의 정치와 정책방향도 수년간 관찰과 연구를 하면서, 그 한계 역시 목도하게 되어 이젠 그걸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제 3의 길을 주창하여 신노동당의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안서니 기든스의 신서, ‘이제 당신 차례요, Mr. 브라운 - 영국 노동당이 다시 이기는 길’은 당연 남다른 의미로 다가 온 것은 물론이다.
이런 의미는 나에게 한정되어 있는 것 같지만은 않다. 최근에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부쩍 영국식 제3의 길에 대한 관심이 늘은 것도 사실이다. 새롭게 헤쳐모인 민주당의 손학규 대표는 직접 영국 사례를 거론하며 제3의 길과 같은 ‘새로운 진보’를 지향한다고 선언해 관심을 모은 적이 있다. 노무현 정부도 말기에도 제3의 길의 한식구격인 ‘사회투자국가(Social Investment State)’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었다. 노무현 정부의 복지부 장관을 지낸 유시민 의원은 이 개념을 가지고 ‘대한민국 개조론’이라는 책도 펴냈다.
하지만 이 들이 과연 제대로 된 이해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조금 의문스럽다. 신노동당은 그냥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90년대 영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에 맞서 새로운 비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낸 매우 정교하게 짜인 정치사상일 뿐만 아니라 그 일관된 논리와 원리는 지난 10여 년간 신노동당 정부 정책 곳곳에 뿌리 깊게 박혀있으며 이는 실제로 공공 서비스와 사람들의 생활에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왔다.
손학규 대표가 신노동당과 같은 ‘새로운 진보’를 이야기 했지만, 글 쓰는 현재 총선 공식 선거운동까지 들어간 시점에서, 이미 논란이 되어 왔던 ‘대운하’를 제외하고 민주당이 어떠한 정책적 이슈를 만들거나 제기한다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다. 학계에서 논의가 된 ‘사회투자국가’는 더욱 신중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거론된 ‘사회투자국가’의 논의 수준은 의문의 대상이다. 유시민 전 장관의 경우도 책에서 무슨 언변을 펼쳤던 간에 의료보호나 국민연금 등 그가 장관 시절 정책은 당면했던 복지 쟁점들에 대한 그의 대책이란 그 혜택을 줄이거나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보면 수사적인 유사점 때문에 자주 동종으로 취급받는 대처리즘에서의 복지와 사회투자국가에서의 복지 개념을 혼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제3의 길이 글자 그대로 사회민주주의도 ‘아니고’ 대처가 표방한 신자유주의도 아닌 ‘제 3의’무엇인 것도 아니다. 신노동당은 전후 복지국가를 이룩한 노동당 정부의 사회민주주의의 정신을 부정하지 않고, 부정한 적도 없다. 오히려 핵심은 그 정신을 변화하는 현대사회에 맞춰 어떻게 실현시킬 것이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노동당이 극복하고자 하는 구노동당(Old Labour)은 구체적으로 따지면 전후 복지국가를 이룩한 애틀리(Attlee) 정부가 아니라 경제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한, 그래서 대처에게 정부를 뺏긴 6~70년대의 윌슨(Wilson) 정부와 카라한(Callaghan) 정부이다.
영국식 제3의 길을 마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것쯤으로 이해하면서 이를 표방하는 이른바 ‘개혁세력’이나, 옛 노동당이 추구했던 사회 정의에 대한 배신쯤으로 취급하는 ‘진보’쪽의 해묵은 비판 역시 이 점을 흔히 소홀히 하고 있다. 이 책에도 1장에 서술했지만 지난 신노동당 10년 집권의 성과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경제는 영국 현대사 사상 최장 안정 성장을 이뤘으면서 대처시절 상당부분 손상되었던 무상의료 등 공공 정책을 복원시켰을 뿐 아니라 대기기간 등 고질적 문제들 까지도 상당 수준으로 해결 해온 것이 사실이다. 아동 70만 명을 포함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빈곤에서 탈출 시킨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이다.
기든스의 이 책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위치하고 있다. 즉 10년간의 신노동당의 성과와 한계를 들여다보면서 10년 전과는 또 다른 변화된 상황과 새로운 쟁점들에 대하여 새로운 혁신의 방향과 구체적 정책 대안들을 새로운 총리가 되는 (그래서 현재 영국 총리인) 또 다른 신노동당의 대표주자인 고든 브라운에게 보내는 고언 형식의 책인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기든스가 시의성 있게 가볍게 쓴 책이기도 하지만 이 책에 담긴 고민과 논의 깊이는 상당한 무게로 다가온다.
하지만 또 그런 면이 이 책의 약점이기도 하다. 이 책의 초점은 철저하게 영국적 상황, 그리고 책이 출판된 그 시점에 매우 충실하게 맞추어져 있다. 다시 말하면 영국 정치 상황과 정책적 쟁점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적지 않을 뿐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이해할 경우 오독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게다가 이런 이 책의 약점은 번역을 통해 더욱 두각 되기도 한다. 몇몇 구절과 개념들에 대한 오역은 영국 정책에 대한 역자의 이해부족을 드러내기도 한다.
가장 치명적인 번역 상 문제는 영국의 무상의료서비스 체계인 NHS(National Health Service)를 ‘건강보험’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NHS는 일반 조세를 기반으로 무상의료제도로 일반의원과 병원뿐 아니라 각종 보건 정책 기구들을 모두 포괄하는 체계이다. 따라서 공적 재원 수단으로 주로 한정되어있으며 보험료 납입에 의해 수급자격이 주어지는 사회보험방식인 우리나라 건강보험과는 개념부터가 전혀 다르다.
또 보건의료 부분에 대한 구절에서 종종 등장하는 재단 병원(foundation hospital 또는 foundation trust)은 NHS에 속한 병원 중 평가가 우수한 병원을 중심으로 그 운영기구(trust)에 사설 병원과 비슷한 방식으로 자율권과 독립적 지위를 부여하는 정책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국가에 의해 운영되는 NHS에 시장적 요소를 도입하는 대표적 정책으로 노동당 내에서도 논란이 많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 없이 번역이 되다보니 이런 시장적 성격을 고든 브라운이 약화시켰다(water down)는 말이 ‘예산을 삭감했다’고 전혀 엉뚱하게 바뀌어버린 경우도 있다. 교통정책(transport policy)이라고 하면 무난했을 법한 단어를 ‘수송정책’으로 번역한 것도 대중적 공공서비스로서의 원래 의미가 아닌 무슨 물류정책쯤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그러나 역자의 영국 정책 쟁점에 대한 이해 부족은 정치학 전공자라는 점에서 양해는 조금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우리나라와 영국 간 ‘정치’개념 차이를 보여주는 현실이기도 하다. 즉, 이 책 자체는 새로운 수상에게 어떻게 성공적 정치를 해서 노동당이 또 집권할 수 있게 만들 것인가를 조언한 매우 ‘정치적’인 책이지만 내용은 정책적 논의로 빼곡히 차 있다. 이는 기든스가 일부러 정책 정치를 유도하기 위해 그렇게 내용을 채운 게 아니라 이미 영국 정치에서는 정책에서 정치적 승부가 나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의회민주주의 산실인 영국 정치가 보여주는 이러한 역동성은 우리 정치에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이 책이 주는 최대의 미덕은 그 역동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현재적 고민과 제안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의 고민은 물론 비단 영국적 현실에 국한하지 않은, 진보의 혁신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진보적 대안을 고민하는 한국 독자가 특히 주목해야할 부분은 ‘공공(public)'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기하고, 보증국가(ensuring state, 본 책에는 ‘확신을 주는 국가’로 번역)의 개념을 제시하는 ‘4장 공공 서비스: 사람을 맨 앞에 두기’와 적극적 복지(Positive Welfare)의 개념을 보여주는 ‘6장 생활양식 바꾸기: 새로운 의제’가 아닌가 싶다.
대처정부는 공공서비스를 대대적으로 민영화 시키거나 시장적 경쟁 요소를 도입한 것은 복지제도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지만 일정부분은 그동안 무시되었던 이용자의 선택권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국가 독점 복지 모델의 문제점을 집은 것이기도 했다. 즉 그 당시 공공 서비스들은 대단히 관료화되었던 것이 사실이며 시민들의 요구는 종종 무시당하거나 이유 없이 주구장창 기다려야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던 것이다. 이에 복지 감축으로 공공 서비스는 줄었어도 서비스 공급과정에 있어 국가의 독점적 지위를 깨뜨림으로서 제공되는 서비스의 만족도는 높아진 사례들이 있다.
기든스는 이런 점에서 공공영역을 확대하되 공공은 곧 국가(state)라는 편협한 규정을 사고는 벗어나서 무엇이 진정 ‘공공성’인가에 대한 재 정의를 시도하고 있다. 이에 맞물린 보증국가라는 개념에서 국가는 공공 서비스 공급에 있어 더 이상 독점적 주체는 아니지만, 그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방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진정 효과적이고 질 높은 공공서비스를 ‘보증하는’책임을 져야하며 그 책임이 구체적인 정책적 수단으로 실현되어야 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적극적 복지 역시 시장 기능 실패에 따른 사후적 개입에서 벗어나 일상적으로 개인의 자율성과 자존감을 증진시키는 복지가 되어야함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얼핏 보면 개인 책임과 선택권을 강조하는 복지 축소논리와 닮은 듯하다. 하지만 기든스가 제시하는 적극적 복지 개념은 개인의 책임 뿐 아니라 그 책임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 적합한 지원에 대한 국가의 책임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장애인의 경우 가능한 사회에 참여하여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할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서 국가는 장애인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 독립성을 보장하고 촉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과 방식으로 서비스를 제공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서비스를 제공하여 자율성을 꺾는 방식을 벗어나 한 개인에게 동원되는 공공 재원 통합해 개인 통장처럼 따로 계좌를 만들어 개인이 스스로 독립적 생활에 필요한 서비스를 직접 설계할 수 있게 하는 개인 예산제(Individual budget)같은 정책이 적극적 복지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딛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희망과 대안을 찾아 제시하기 위한 개혁 진영과 진보진영의 노력으로 점점 서구 복지국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듯하다. 나도 영국 유학생활을 어떻게 하게 되면서 얻은 가장 값진 것은 다른 사회를 깊숙이 체험하고 공부하면서 발견하게 된‘다른 사회에 대한 가능성’점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 ‘다른 사회’가 영국도 아니고 그 ‘다른 사회’를 위한 길이 ‘제3의 길’도, ‘신노동당’인 것도 아니다.
나는 우리사회의 대안을 찾는데 있어 다른 나라에 주목할 때, 그 나라에서 제기되는, 그래서 그 나라에서 성공적이었다는 그 ‘무엇(what)'이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것이 특정 정책이었던 어떤 정치사상이었던 간에 말이다. 오히려 그 ‘무엇’을 이해하면서 궁극적으로 정작 얻어야 할 것은 ‘어떻게(how)'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환경과 조건에서 떨어진 결과물만 달랑 물고 들어와 그 나라 성공사례를 권위삼아 써먹어 보려는 시도가 우리나라에 진정한 답을 줄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 나라의 어떤 조건과 환경 속에서, 어떻게, 어떤 원리로, 어떤 과정으로, 어떤 기반을 통해 그 대안이 도출 된 것이며 또 그 결과물이 어떻게 적용되고, 어떻게 실천되어 성공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고, 어떤 점들이 어떻게 문제가 되어 한계로 들어났는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전혀 다른 환경과 조건을 가진 우리나라에서의 제대로 된 함의를 찾는 다는 것은 명백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점이 이 책과 같이 다른 나라의 고민을 들여다 볼 때 항상 명심해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오마이뉴스, 프레시안에도 축약본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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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습니다. 특히 "기든스는 이런 점에서 공공영역을 확대하되 공공은 곧 국가(state)라는 편협한 규정을 사고는 벗어나서" 이 부분은 많이 공감하게 되네요. 대처 정부가 기여한 바에 대해서도 동의하고요. 특히 유니버셜테스팅이라는 개념은 괜찮은 것 같아요. 결국은 그마저도 정치가 동원되기는 하지만요.
2008/04/26 15:33공감하시며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원칙은 지키되 변화하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유연해지고, 그래서 실질적인 해법을 찾아나가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이 현실에서 쉽지만은 않고 그러다가 원칙이 흔들리는 경우도 많지만 말입니다.
2008/04/26 2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