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책 주도권 가진 영국 정치 역량과 한국 정치의 현주소
97년 이후 2번의 대패를 포함하여 3번 연속 총선에서 패배한 영국 보수당은 요즘 한껏 고무되어 있다. '뉴 키즈 온더 블록'으로 불리는 젊은 새 당수 데이비드 카메론의 바람 때문이다. 10년 가까이 지지율에서 뒤져오던 보수당은 작년 카메론의 당수 선출 이후 노동당을 계속 앞서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차이가 여전히 그 차이가 매우 근소하다는 데에 있다. 최근 노동당에서는 사퇴압력 파문으로 토니 블레어가 1년내 사임을 약속한 상황에서 강력한 차기주자인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이 버티고 있는 터라 이러한 수준은 여전히 보수당에게 차기 집권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카메론 보수당 당수는 새로운 정책 비전을 제시하는데 골몰하고 있다. 당수 선출 이후부터 이미지 정치인이라는 지적을 받아온 카메론은 환경 이슈를 전면에 내세워온 데 이어 최근 전당대회에서는 국가 무상 보건의료 서비스인 NHS(National Health Service)를 보수당 최우선 정책 순위로 두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공공 예산 삭감에 매우 집착했던 이전 보수당 정부였던 대처 정부를 생각하면 매우 획기적인 변화다. 이제 관심은 이를 어떻게 보수당의 정체성과 결합시킬 것인가에 집중되고 있다. 그의 차기 선거의 승리 여부는 기본적으로 얼마나 자신의 국가 비전을 선명하고 일관성 있게 제시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책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영국 정치
이처럼 영국 정치에서 스캔들성 사건들이 터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큰 정치적 흐름은 정책을 따라 움직인다. 정책이란 말만 들었지 정작 정치에서 정책이 제대로 논의되는 것을 본적이 없었던 한국인의 눈으로는 그저 신기하게 보일 뿐이다.
특히나 사회정책을 공부하는 나로서는 영국 정치권의 정책 실행 능력에는 혀를 내두루지 않을 수가 없다. 선거 때 제시된 각 분야의 강령과 정책(매니패스토)은 집권 시 정책 녹서(Green Paper)와 백서(White Paper)를 거치면서 구체화 된다. 이는 각종 시행계획들과 실천으로 이어질 뿐 아니라, 구체적인 목표와 이를 측정하는 지표들이 제시되어 이를 통해 매년 그 성과 정도까지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부처별로 각 정책 분야마다 장관을 비롯하여 수명씩 배치되는 정책 차관(Minister)들은 집권당 국회의원으로 채워져 이같은 정책들을 주도한다. 분야별 정책 이슈가 제기될 때 마다 방송뉴스에서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민망하리만치 집요하게 질문하는 진행자와의 인터뷰에서, 적극적이고 구체적이며 논리적으로 대응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그저 자리를 채우는 정치인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 전쟁에 지친 국민들에게 베버리지 보고서로 상징되는 새로운 복지 국가의 비전을 전면적으로 실현시켰으며, 그 복지국가가 위기에 빠지고 경제가 침체되었을 때 신자유주의를 제시하고 나왔다.
이로 인해 공공 서비스가 무너져 불만이 높아지자 다시 제3의 길이란 새로운 기치를 내놓아 10여년 가까이 다양한 개혁을 쉼 없이 밀어붙여온 영국 정치의 역동성은 방향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진짜 정치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닐 수 없다.
스스로 재생산을 포기한 한국 공동체의 위기
한국 사회는 분명 심각한 위기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 심화되는 양극화, 세계 최고 속도로 진행되는 고령화, 고용 없는 성장,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격화되는 경쟁 속에 한계를 모르고 치솟는 사교육비, 그로인해 날로 악화되는 서민들의 삶, 여유라도 좀 있는 계층에서 나타나는 해외 탈출 러시 등…. 그 중 세계 최저의 출산율은 가장 상징적인 징후이다. 스스로의 재생산을 거부하는 공동체에서 어떻게 희망을 말할 것인가.
최장집 교수의 지적처럼 노무현 정부 이후 민주화는 분명 질적으로 나빠졌다. 80년대 말 이후에 군사정부도 한국 사회복지가 처음 대폭 확장기를 맞을 정도로 여론에 민감했다. 김영삼 정부도 그나마 금융실명제등 그동안의 개혁의제를 시행했으며 김대중 정부도 경제위기 상황에서 미흡하나마 재벌개혁과 복지개혁을 꾸준히 추진했다.
그 후에도 국민은 지속적인 개혁을 원했고 노무현 정부를 선택했다. 하지만 최초로 개혁세력만으로 집권한 이 정부는 도덕적 결백성에 파묻혀 귀를 닫아 버렸고, 개혁은커녕 되레 사회적 위기를 더욱 악화시키는 한미FTA를 부여잡고 있다. 국민들 사이에서 좌절과 배신감이 깊숙하게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 정치권이 존재에 대한 이유부터 되물어야 하는 이유
재보선의 완패로 또다시 뿌리 깊은 국민의 좌절과 배신감을 확인한 소위 집권당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는 새로운 비전도, 새로운 정책 모색도 아닌 구태의연한 이합집산 이야기뿐이다.
아직도 아무도 사회적 위기에 대한 인식도, 정치인으로서의 깊은 책임도 인식하지 못한 채 껍데기만 남은 권력논의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인식 수준으로는 집권은커녕 정치세력으로서의 생존자체를 걱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지지율의 고공행진을 달리고 있는 한나라당도 별반 다를 바는 없다. 개혁 세력에 대한 배신과 좌절에 대한 반사이득과 그나마 무언가를 했던 과거 정권에 대한 막연한 기억 그리고 청계천 복개와 같은 상징적 정책으로 인해 생긴 정책 추진력에 대한 이미지가 그들을 받쳐줄 따름이다.
현 집권 세력에 비해 별다른 능력이야 과거의 경험정도인 그들에게서 현재 심화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위기를 대처할 능력은커녕 이에 대한 인식조차 보여준 적이 없다.
진짜 암울한 미래는 그 다음이다. 만약 개혁 세력에 이어 보수 세력까지 위기에 대한 무능력이 명료하게 확인 된 후에 스스로의 지속성까지 상실하고 있는 공동체의 다음 선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권력에 대한 습관적인 이해관계에 앞서 정치권이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2006년 10월 30일 오마이뉴스 기고, 31일 메인서브로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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