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사태와 개발독재 이데올로기
하도 과학은 과학자가 검증해야 한다고 하니 과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하번 이번 황우석 사태에 대해 ‘사회적’으로 검증해보고자 한다.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이야 과학의 몫이다 하더라도 이번 황우석 사태는 엄연한 사회적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개발독재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성장'에 있다. 즉 번영이 모든 문제에 우선하며 또한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것이다. 민주고 인권이고 평등이고 성장의 이른바 ‘낙수효과(trickling down effect)'가 모두를 윤택하게 할 것이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 '성장'을 위한 전략은 자원의 소수 집중이다. 될 성싶은 소수에게 자원을 몰아줌으로써 효과를 극대화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 전략으로서 재벌이 출연한 것이다. 이 소수 기업에게 자원은 물론 각종 특혜와 지원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성장의 동력을 극대화 한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역사적으로 성공했다. 우리 사회는 경험적으로 이 이데올로기가 입증된 것이다. 경제는 성장했고, 객관적인 삶의 질은 높아졌다. 그 과정에서 저곡가 저임금 정책 등 소수에게 자원을 몰아주기 위해서 다수의 희생을 강요했었지만 결과적으로 '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목표는 달성 한 것이고, 다수의 국민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것이 현재까지도 우리사회가 박정희 향수에 젖어있는 실질적인 이유이다.
하지만 이 이데올로기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성공이 모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는 성과의 배분이 필요한데 성장을 위해서 소수에게 자원을 집중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이데올로기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고속성장이 필수적이다. 즉 성과의 매우 작은 부분만 '낙수'한다면 그 몫이 커지기 위해서 전체적인 절대 성과의 크기가 훨씬 커야 자원의 소수 집중과 ‘낙수효과’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배분되는 작은 성과의 실제적 가치는 매우 작아지고 결국 낙수효과는 실질적으로 일어나지 않게된다.
IMF가 이러한 모순을 드러나게 해주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숫자상 성장수치는 되돌아 갔지만 그에 비해 내려오는 몫은 크게 줄어든 것이다. 즉, 이전의 이데올로기가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고용없는 성장'이 말해주듯 몇개 기업이 잘 나간다고 해서 실업이 해결되지도 않고 가계수지 또한 나아지지 않는다. 그리고 새롭게 도전받는 사회적 위기들을 대처하는데 근본적인 한계또한 드러내고 있다.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와 출산율 저하, 끝없이 치솟는 교육비용, 노동수급 불균형과 실업, 농촌의 붕괴 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음에도 근본적인 사회적 대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개발독재 이데올로기의 또다른 약점, '공공성의 부재'에서 크게 기인한다.
즉, 개발독재 이데올로기는 철저하게 '개인'에게 책임을 돌린다. 가난은 물론 이고, 각종 사고 등 불행 등도 모두 개인에게 책임을 돌린다. 반대로 성과 역시 모두 '개인'에게 돌린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치열한 경쟁속에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살아남은 몫은 또 개인 것이기 때문에 개개인은 성공을 위해서라면 갖은 희생을 마다하지 않게되는 것이다. 개발독재시절 수없이 존재하는 자수성가의 신화는 이를 정서적으로, 또 경험적으로 뒷받침 하고 있다. 그만큼 어떠한 성과를 개인이 독점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이는 또 소수에 대한 자원의 집중을 정당화 했다. 대신 누구나 당하는 '사회적 위험'이라도 공동으로 해결하는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 위험을 피하는 것은 순전히 개인 몫이고 그래서 살아남는 것 또한 역시 개인 몫일 뿐이다.
따라서 성장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개개인에게 ‘낙수’되는 것이 줄어들고, 그 책임을 개인이 떠안다 보니 개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 몸집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회적 재생산인 출산을 포기하게 되고 전통적인 가족부양도 힘들어지게 된다. 전통적인 가족부양 체제가 붕괴되어도 사회적 보호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노인계층은 가난으로 몰리고 가족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 거기에서 살아남으려면 죽으나 사나 경쟁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자식에 대한 교육 비용은 치솟고 아이들은 밤새 경쟁에 시달려 인생을 아예 포기하는 자살은 늘어만 간다. 교육 비용의 상승은 다시 가계의 부담으로 들어와 부모는 또다른 희생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자원의 소수집중은 달라지지 않는다. 사회적 문제를 위한 사회적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경제성장율이 회복되어도 고용은 늘어나지 않고, 불평등은 심화되어 간다. 고속성장을 배경으로 OECD중에서도 낮은 수준이었던 불평등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시장개방으로 농촌이 붕괴되어도 '공산품 수출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논리만 횡행할 뿐이다. 농촌의 붕괴가 사회적으로 또다른 부담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인식조차 안되는 듯하다.
경제 패러다임 변화로 인한 가계수지 악화, 고령화로 인한 사회적 부담 증가, 교육경쟁 비용 증가, 사회 양극화, 실업 증가, 농촌 붕괴,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개개인의 부담 증가 요인만이 존재하고 탈출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심화될 수록 개개인의 삶은 날로 악화되고 사회적 위기는 심화될 수밖에 없다. 이때문에 이 악순환의 탈출을 위해서는 근본적인 공공의 대처가 필요한데고 취약한 사회적 공공성은 이를 출발부터 어렵게 하고 있다.
개개인은 공공의 해결보다는 살아남기 위한 경쟁의 심화로 해결하려고 든다. 어른은 투잡, 쓰리잡으로 아이들은 더 강도높은 학습으로. 국가는 문제 해결자로서 스스로를 인식하지 않는다. 단지 그동안 해왔던 조정자, 규제자로서의 인식만 할 뿐이고 변화된 패러다임에서는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이 속에서 해결의 조짐이 있을리가 없다.
이번 황우석 사태는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회전체가 개발독재 이데올로기에 얼마나 심각하게 갖혀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황우석 박사가 세계적 성과를 내었다. 이에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자랑스러워 하는 것은 IMF때 박찬호, 박세리에 대한 2002년에 월드컵에서 느꼇던 감정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국익, 즉 성장이라는 논리가 결합하면서 문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모든 조건이 안좋은 침체된 상황에서 희망의 메세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계적인 성과와 국익, 그것은 잃어버린 줄 알았던 '성장신화'의 재현이었다.
개발독재 이데올로기에 익숙한 언론과 정치권은 본능적으로 찬양하기 시작했다. 침제된 국민의 희망메세지로 말이다. 그 논리 안에서는 침체에 빠질 우리 모두를 구제해줄 구세주의 메세지였다. 하나의 성공이 모두에게 번영으로 돌아왔던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변화된 패러다임속에서 그 자원이 어떻게 배분되는가에 대한 전제없이 이제 가능한 일이 아니게 되었음에도 이 성공신화 앞에서는 그것 뿐 아니라, 윤리, 인권, 세계적 기준 등은 다 쓸데없는, 거론할 가치가 없는 문제로 치부되었다.
따라서 PD수첩의 보도 이후 황 박사가 줄기세포허브 소장직을 사퇴했을 때 불길처럼 일어난 저항은 '희망의 메세지'를 강탈당한 것에 대한 본능적이고 정서적인 저항이었다. 그만큼 개발독재 이데올로기와 국민적 경험은 체내화 되어잇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오히려 비판이 향후에 도움이 된다'는 둥, 언론의 비판기능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둥의 목소리는 이미 이성적 토론의 대상이 될 수없었다. 희망의 강탈에 대한 정서적 분노가 모든 것을 지배했다.
결국 더이상 개발독재 이데올로기는 답을 주지 못하는 데도 그에 젖어있는 대중은 그 이데올로기 상의 메세지에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변동에 의해서 이전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그 효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토록 정서적으로 신봉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직까지 대체할 이데올로기가 출현하고 사회적으로 경험된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주화 되었다고 말하지만 민주화는 '절차의 논리'일 뿐이다. 즉, 개발독재 시절에는 '민주화'가 모은 문제를 해결해줄줄 알았다. 그도 그랬던 것이 모든 사회문제를 가로막는 것은 한곳에 집중된 독재권력 그것과 모두 연결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만 제거가 된다면 모든 문제는 모두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회가 민주화 되면서 문제를 해결되는 것이아니라 '드러나게' 되었다. 독재에 꾹꾹 눌려있던 것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주화된 절차'아래서 해결방안이 논의되어야 한다. 하지만 '반'독재 투쟁에만 집중하던 세력은 반대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대안을 창출하는데는 대단히 미숙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정부때 '성장과 분배는 함께 가는 것'이라는지 '생산적 복지'라든지 하는 다소 대안적 논의가 있었지만 지금 확인되듯이 그것은 철저하게 김대중이라는 '개인'에 기대있는 것이었지 의미있는 정치적 세력의 대안으로서 작동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속속히 수면위로 올라오는, 민주화된 세상에서 새로운 대안에 의해 해결되어야 할 이런 문제들이 방치됨으로 인해 어려움은 깊어지고 혼란만을 느끼게 된다. 이런 와중에도 대안생산의 역할을 해야할 정치권은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을 뿐아니라 그것이 자기 역할이라는 점조차 인식을 아직도 못하고 있다. 이는 보수나 진보나 매 한가지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대안의 부재 상태에서 국가권력은 민주화된 정치적 권력인 대통령과 의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료집단에게로 돌아가 버렸고 그들은 각자의 이해와 관성에 의해 일을 처리할 뿐이다. 대안과는 당췌 거리가 멀다. 관료적 집행형태는 여전하고 개혁을 한다고 하면 자기 예산 불리기에 1차적인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패러다임의 변화, 사회정치적 혼란, 경제적 어려움, 대안의 부재가 곂치니 사회적으로는 목표도 확실했고, 성과도 분명했었던 개발독재에 향수를 느낄 법도 했던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그동안 축적된 민주화의 경험으로 독재의 귀환은 원하지 않더라도 개발독재 이데올로기의 메세지에는 매우 목말라 있던 것이다. 그런 와중 황우석 박사는 그 메세지가 되었던 것이다. 세계적 성과, 막대한 국익, 그리고 가치적 영역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과학자'라는 점이 겹치면서 마음껏 숭배하고 희망의 메세지를 만끽할 수 있는 대상을 만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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