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론] 연구윤리는 약자를 위해 존재한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본래 '동양적 가치'하면 물신숭배로 윤리가 바닥에 떨어졌다는 서양것들을 비판하기 위해 들먹여 졌던 것이다. 물질적 가치를 숭배하는 서양에 비해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동양은 도덕적, 정신적 우위를 가졌다고 보통 회자되어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 황우석 논란에서는 윤리의 잣대는 '서양의 것'이고 동양적 가치는 이런 서양적 윤리 잣대를 반박하는 논리로 등장하고 있다.

 

동양적 가치를 정신적·도덕적인 우위로 생각하는 사고는, 동양을 '정신적'으로만 동경하는 서양 것들의 오리엔탈리즘에 기인한 바 없지 않다. 하지만 현재 황우석 논란을 두고 '동양적 가치'를 내세우는 것 또한 매우 궁색할 뿐만 아니라 이번 논란 자체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지 않을 수 없다.

 

본 우원, 안 그래도 황우석 논란을 보면서 한 '국민적 영웅'에 대한 지지냐 폄하냐 라는, 매우 감정적이면서, 수없이 내세우는 '국익'에도 전혀 도움도 안되는 방향으로 흐르는데 심히 염려했었던 바, 또한 마태우스 우원의 단상 역시 그에 전혀 벗어나지 않고 있는 바, 그간 논란에 대해서 차근차근 하나씩 디벼보기로 하겠다.

 

짧지 않은 글이지만 이번 사태를 둘러싼 모든 논란을 애써 종합 정리, 분석하느라 그런 것이니 들어가기에 앞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 바라는 바이다.
 

  죽어버린 우리의 윤리

 

'윤리'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본 우원 머리를 스치는 것은 '암기과목'이다. 그렇게 '윤리'라는 가치는, 달달 외워 답안지에 쓰는--실 생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우리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다. 아니, 심하면 되려 있는 놈이 없는 놈 등쳐먹는 소리 쯤으로 여겨진다. 이것이 자라면서 교육받은 소위 '국민윤리'의 내용이었다.

 

마침 최근에 이러한 윤리교육을 정면으로 비판한 책이 출판되었다. <도덕교육의 파시즘(길 출판사, 2005년)>이 그것이다. 본 우원, 공사가 다 망한 관계로 사 읽어보진 못했지만 여러 곳에 소개된 글들을 종합해보면, 이 책의 필자는 우리나라 도덕교육이 파시즘적 사고에 의한 순종을 가르치는 '노예를 위한 도덕교육'이었다고 주장한다.

 

본 우원은 이같은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 학교에서 국민윤리 교과서를 밑줄 쫙 치며 달달 외웠던 기억을 되살려 보면 이같은 주장에 상당부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윤리 교육 속에서 배운 '동양적 윤리'란 항상 복종의 미덕이었다. 말이 좋아 미덕이지 그것은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이었다. 중세시대 서양 왕들은, 자기 권력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며 농노들에 대한 갖은 횡포에 전혀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가운데, 우리나라의 예처럼 민심은 천심이네 덕치네 하며 국민을 두려워할 줄 알았던 '동양적 윤리'는 그저 권력자의 마음 좋은 인심으로 치장되었다.

 

권력에 대한 충성을 주입시키는 윤리교육과 함께 우리 가슴 속에 자리잡은 살아있는 윤리가 있었으니 그것은 '성공'이었다. 이는 조국 근대화에 사명을 띠고 정권을 잡으신 박통께서 온 국민 가슴 하나하나에 친히 심어주신 윤리였다. 조국의 성공과 개인의 성공이 따로 없었다. 조국의 성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은 숭고한 것일 뿐이었다. 조국과 개인의 성공이 따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국의 성공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개개인에게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가에 문제는 그냥 '민족'의 이름으로 무마되었다. 인권이니 민주니 하는 것은 성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었다. 도시빈민이 날로 넘쳐나도, 여공들이 폐병으로 쓰러져 가도 조국의 성공은 항상 이들에게 영광을 돌려줄 것 같았다.

 

노예교육으로 전락한 윤리교육, 그리고 박통의 개발독재 속에 주입된 성공지상주의가 결국 우리네 윤리를 개뼉다귀로 만들어 버렸다. 윤리 자체가 제대로 취급된 적이 없었기에 우리는 그저 윤리 하면 배부른 소리나 잔디를 밟지 않는 것 이상으로 인식하기 어려웠다.

 

윤리, 그거 말은 좋지만 성공을 위해서 그까이거 쯤이야 하는, 우리에게 매우 흔한 사고는 노예교육화된 윤리교육과 개발독재의 합작품으로 우리 가슴 속 깊게 자리잡아 왔다.

 

이렇게 죽어버린 윤리를 가지고 '동양적 가치'라고 칭한다면 이건 장고한 역사를 단 몇십 년 개발독재 역사에 도매급으로 팔아먹는 것 아닐까?
 

  한달에 한번 나오는 난자 좀 기증 한다기로 서니…

 

그렇다면 조금 길은 돌아온 것 같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윤리' 그 단어에 대한 이미지를 일단 지워보고, 이번에 황우석 논란에서 등장하고 있는 '연구윤리'에 대해서 한번 차근차근 디벼보자.

 

일단 집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이 이전까지 논란이 되었던 '생명윤리'와 이번에 논란이 되고 있는 '연구윤리'는 엄연히 다른 사안이라는 것이다.

 

'생명윤리' 논란은 연구에 사용되기 위해 수없이 버려져야 하는 수정된 배아를 과연 인간으로 볼 것이냐 하는 매우 논쟁적인 사안이다. 본 우원 역시 딱히 판단이 잘 안 서는 문제이고 국제적으로도 뜨거운 논란이 반복되고 있는 사안이다.  

 

그러나 이번에 논란이 되는 것은 '연구윤리'다. 이건 '생명윤리'같이 철학적이고 논쟁적인 사안이 아니라 '연구라는 목적 아래 침해될 수 있는 약자의 인권을 어떻게 보호할 것이냐'라는 매우 현실적인 사안이다.

 

그렇다면 매달 원하지도 않아도 여자의 몸에서 한달에 하나씩 나와 없어지는 난자를 기증하는 문제가 뭐 그렇게 인권하고 관련이 있을까. 그것은 난자기증이 이루어지는 과정의 특이성 때문에 그렇다. 마침 마태우스님이 정자기증의 예를 들으셨으니 일단 이것과 비교해 보기로 하자.

 

정자, 남성동지들이 매우 잘 아시겠지만 심심풀이 및 심리적 안정을 위하여 수시로 딸딸이를 쳐주는 순간마다 수억 개가 그냥 쏟아진다. 고통은 커녕 쾌락만이 있을 뿐이다. 난자, 한 달에 딱 한 개 나온다. 딸딸이를 아무리 쳐도 나오지도 않는다. 긴 바늘을 몸속에 쑥 집어넣어서 억지로 빼줘야 한다. 쾌락은커녕 시술에 의한 고통이 있을 뿐이다.

 

거기서 그칠까. 한달에 딱 한 개 나오는 난자이기 때문에 난자 기증을 위해서는 한번에 여러 개의 난자가 나올 수 있도록 호르몬 조작을 해주어야 한다. 즉 2~3주 동안 매일 호르몬 주사를 맞아가며 배란을 억제했다가 한꺼번에 난자가 나오도록 유도를 한 후 시술을 통해 뽑아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복통은 물론 복수가 차거나 복부팽창, 난소비대 등 부작용을 겪을 수 있으며 심하게는 불임 위험까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사망에까지 이른 최악의 경우가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이 정도면 여기에 정자기증을 들이대는 것이나 한 달에 한 번 나와 없어지는 난자쯤이야 하는 얘기가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아무에게나 순전한 자발성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난자기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문에, 정말 의학의 발전을 위해 이러한 위험성을 감수하고 난자를 기증하는 사람은 추앙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또 그때문에 기증의사는 압력이나 금전적 보상 같은 다른 요소에 의해 영향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여성 연구자는 자발적으로 난자 기증하면 큰일나나

 

그러면 여성 연구자가 난자 기증했다는 게 뭐 그리 큰일날 일인가. 여성 연구자는 자신의 의지로 난자를 기증할 자유도 없단 말인가.

 

이번에 논란이 된 여성연구자가 정말 자기의 100% 자발적 의지에 의해 기증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명시적으로 금지되지 않는 한, 생명공학 연구현장에서 여성 연구자의 부당한 차별을 막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생각해보자. 위에서 말한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자발적 난자 기증자를 찾는 것이 그만큼 힘든 것은 당연하다. 또한 난자 기증자가 많다 하더라도 연구에 필요한 난자는 수백 개가 넘기 때문에 항상 난자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대상이 연구의 목적도 잘 알고 있고 연구의 성과와 직접 연관이 있는 연구팀 내 여성연구자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원 기증이 명시적으로 금지되지 않을 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수없는 심리적 유무형의 압박을 받지 않을 여성 연구자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또한 이런 환경에서 연구에 자유롭게 나설 수 있는 여성 연구자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바로 이런 위험 때문에 명령계통에 있는 연구자가 연구대상으로 투입되는 것이 국제적으로 금기시 되고 있는 것이다.
 

  난자 기증에 150만원?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도 금지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난자 공여자에게 150만 원을 준 것이 왜 그렇게 문제가 될까. 난자 공여에 대한 감사와 보상 차원에서 그 정도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일단 외국의 예를 든다면 난자 매매를 금지하고 있는 영국의 경우, 금전적 보상의 상한선을 250파운드(약 45만원 수준)로 정하고 있다. 그 이상이면 이타적 동기가 아닌 금전적 동기의 위험성이 있다고 보는 셈이다. 영국에서 보통 체감 물가가 우리나라의 두배에 가깝다는 점을 고려하면, 150만 원에 비해 얼마나 낮은 수준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위에서 언급한 위험성을 감수하고 난자를 제공하는 것인데 돈 좀 많이 줬기로서니 문제가 왜 되나. 왜냐하면 금전적 동기 수준으로 보상이 이루어질 경우 결국 피해는 돈이 궁한 사람에게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큰 위험이 있더라도 대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궁한 처지에 위험은 '가능성'일 뿐이라고 애써 위로 하며 돈을 위해 난자를 내놓을 사람은 가난으로 벼랑에 몰린 여성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미 연구용이 아니면 난자매매가 가능한 미국에서는 반복적인 난자 매매로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한다면 이번에 논란이 되고 있는 윤리 규정들은, 서양적 기준을 무리하게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연구과정에서 강제당할 수 있는 약자--하급 연구자나 연구대상자--를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연구윤리'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논란은 황 박사에 대한 선진국의 견제?

 

<네이쳐>지에서 처음으로 황우석 박사 연구에 대한 윤리의혹을 제기했을 때, 대부분의 언론은 '견제' 또는 '발목잡기'식의 제목을 달고 보도했었다. 지금도 여전한 이러한 보도태도는, 이번 논란이 마치 선진국들의 견제에 국내 언론이 부하뇌동하여 국민영웅 황박사를 무릎 꿇게 만든 사태라는 이미지를 만드는데 크나큰 기여를 했다.

 

만약 윤리기준이 선진국 자신들에게는 관대하면서 황우석 박사의 경우에만 유독 엄격하게 적용해 바판한 것이라면 '견제'나 '발목잡기'라는 말이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기준들은 이미 이들에게 오래 전부터 보편적 규범으로 자리 잡혀 있으며, 어길 경우 지위고하나 업적 정도를 막론하고 퇴출 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 주장은 해당 사항이 없다.

 

본 우원이 영국에서 공부를 시작할 때 사회조사방법론 수업을 들은 적 있다. 각 조사 방법론 별로 시시콜콜 윤리적 쟁점들을 따지고 토론할 때 본 우원도 이 넘들 참 별나구나 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학 리포트에 짜깁기가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일이지만, 여기에서 한번 걸렸다가는 비고의성을 입증한다 해도 최소 낙제나 유급이고, 보통은 바로 퇴학당하는 것이 당연시 된다는 점에는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각 학문 분야마다 윤리 규정이 마련되어 있고 그에 따른 윤리위원회가 설치되어 실질적으로 제제 권한을 가지고 심의를 하는 환경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회조사에서도 이럴진대 사람의 신체를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에서는 상상하고도 남음이었다.

 

윤리 논란을 이유로 황우석 박사와 결별을 선언했던 섀튼 박사도 이와 비슷한 윤리 논란으로 수년 전 거의 퇴출위기에까지 놓였었다는 사실은 이미 국내보도를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엄격한 윤리를 적용하는 데에는, 기본 윤리를 갖추지 못한 자는 학문을 할 자격이 없다는 사고가 바탕에 깔려 있다. 이러한 사고는 이들 나름대로의 역사 속에서 논쟁과 논란을 통해 쌓여왔던 것이기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계적 성과로 국제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된 황우석 박사에게 연구 윤리 문제를 적용하는 것은 저들에게 있어서는 그만큼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또한 이는, 세계적 성과를 내고 생명공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지위를 획득한 연구자에게 그에 걸맞는 윤리적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계적 성과를 자랑하는 이면에, 세계적 기준을 들이대자 '왜 우리 황박사만 같고 그래'라고 한다면, 지위는 원하면서 책임은 부정하는 모순 이상이 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도 황박사에 대한 옹호가 '국익'에 도움이 될까

 

그래도 우리가 곤경에 빠진 황우석 박사를 옹호하는 것이 애국자로서의 도리 아닐까?

하지만 지금과 같은 '황우석 살리기' 열풍은 국익이 되기는커녕 미래의 연구에 대한 신뢰마저도 위협받게 만들고 있다.

 

윤리 논란을 백날 양보했다고 치자. 아무리 윤리가 배부른 소리인들 세계적으로 생명공학 연구를 주도하는 나라가 되려면, 고상한 '생명윤리' 논란은 일단 접어두고라도, 연구자의 기본 요건으로 취급되는 '연구윤리' 논란을 과연 피할 수 있을까? 이 논란은 세계적 지위를 노리는 이상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네이처지를 통해 논란이 불거진 상황에서 계속 덮어두기만 한다면, 이는 상황을 훨씬 더 크게 만드는 일일 뿐이다. 결국은 드러날 수밖에 없으니.

 

많은 네티즌이 <PD수첩> 보도를 보고, 국익을 위해 황우석 박사에게 미리 알려주고 보도는 하지 말아야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황우석 박사측은 꾸준히 의혹을 부인만 하다가 보도에 임박한 시점에 가서야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모든 의혹이 다 사실로 드러난 시점에서 사실을 보도한 언론에 맹폭격을 가하는 현재의 분위기가, 실추된 국제 과학계의 신뢰를 회복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현재와 같은 무조건적인 감싸기는, 결국 황우석 개인은 물론 우리나라 전체 과학계의 신뢰를 의심하게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정 국익을 원하고, 진정 황우석 박사를 위한다면, 향후 같은 일의 반복은 물론이거니와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엄격한 국가규제기관의 확립을 촉구해야 할 일이다.


  진정 난치병 환자를 위해서라면…

 

흔히 황우석 박사의 연구가 난치병 치료의 희망을 주기 때문에 이들 약자의 입장에서라도 윤리논란은 접어두고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진정 난치병 환자들을 위한다면, 윤리 논란 뿐만 아니라 황우석 박사 연구에 대한 사회적 차원에서의 더 큰 논란이 절실하다.

 

황우석 박사는 그간 줄기세포 연구가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겠다고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그 때문이건 아니건 줄기세포에 의한 난치병 치료법이 발명되면, 고통받는 수많은 환자가 '자동적으로' 혜택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폭넓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의학적 발전에 따른 수많은 경우를 비추어보면 이는 순진한 믿음에 불과하다. 그에 걸맞는 제도가 확립되어 있지 않는 한, 의학 발전의 1차 수혜자는 제약회사나 의료회사지 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선진의료 기술을 가지고 있더라도 전국민의료보험이 확립되어 있지 않아 수많은 가난한 환자들이 얼마든지 치료가능한 질병에도 죽어가는 미국 현실이 그 적나라한 예이다. 값비싼 치료제에 생활고에 허덕여야 하는 우리나라 백혈병 환자나, 증상완화제가 개발되었어도 거의 혜택 받지 못하고 조류독감에 무방비에 놓여있는 수많은 동남아 사람들 역시 가깝게 찾을 수 있는 예이다.

 

무슨 소리인가. 황 박사께서 모든 성과를 국민에게 돌리겠다고 약속하시었지 않았는가. 그러나 아뿔사, 이번 논란에서 드러났듯이 그 국민에게 돌리겠다는 성과의 특허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개인 병원장일 줄이야.

 

난치병 환자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이같은 매우 치명적일 수 있는 사안이 드러났는데도 전혀 문제삼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우 순진해서라고 해야 되나?

 

황우석 박사와 이 특허의 거의 절반을 '개인적으로' 차지한 노성일 원장이 모두 속해있는 일명 '대통령직속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는 그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의료를 공공의 권리 차원이 아닌, 철저한 '산업'의 논리로서 접근하고 있다.

 

물론 세계적 생명공학자와 상당한 특허권을 가진 사람이 참여하고 있으니 그 '산업화'의 핵심에는 '생명공학'이 중심에 놓여있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황우석 박사의 연구가 모든 난치병 환자를 위한 희망인 줄만 알았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실망스러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문제도 무시한 채 국민영웅 황우석 박사를 옹호하는데만 급급하다면 '난치병 환자의 희망이다'라는 말 앞에 이 한 단어가 매우 필수적일 것이다.

 

'돈 많은'…
 

  애국과 파시즘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자기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터전인 조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또한 서로 겪는 어려움을 함께 힘을 합쳐 해결해 나가는 정신적 기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국애가 보편적인 원칙과 비판적 사고를 무시하기 시작했을 때 파시즘으로 치닫는 것은 매우 손쉬운 일이다.

 

'본래 연구는 비윤리적인 것이고 가뜩이나 열악한 환경에서 선진국 따라잡으려면 윤리를 따지기 힘들다'는 마태우스님의 논리가 '어차피 세상은 정글이고 자원 하나 없는 우리나라에서 선진국 따라잡으려면 인권이고 민주고 따지기 어렵다'했던 개발독재의 논리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는 점이 본우원이 이번 논란에서 생각지 못했던 또 다른 면을 깨닫게 해주는 듯 했다.

 

석유로 돈 좀 벌려고 전쟁을 일으킬 만큼 시장의 논리가 판을 치고 비도덕적인, 소위 '선진국'들 조차도 학계만큼은 연구성과를 위해 약자의 인권이 침해되고 상업적 이해에 왜곡되지 않기 위해 엄격한 윤리를 유지하는 노력이 보편화 되어 있다. 마찬가지다. 우리나라가 윤리적이지 않다고 학계도 특별히 윤리를 적용할 필요가 있겠냐는 논리는 궁색하다.

 

또한 연구란 원래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적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원래 요구되는 것이 많은 법이다. 이 요구 조건에 맞게 연구에 요구되는 난자의 수를 대폭 줄일 수 있고, 난자 기증에 따른 위험을 극소화 할 수 있는 '세계적 기술'을 개발하는 것 또한 과학 발전에 맡겨진 또 다른 과제인 것이다.

 

연구 윤리를 방기해 약자의 피해를 눈감는 것이 결코 길이 될 수는 없다.

 

- 2005년 11월 27일 딴지일보 기고, 28일 보도

이 글에서 반론대상이 된 글은 [단상] 윤리도 결국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마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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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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